모처럼 고향에 갔다가 귀촌한 형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조카며느리가 며칠 뒤 출산한다는 거다. 형은 좋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며느리의 걱정을 살짝 털어놨다.의사인 며느리의 걱정은 현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U광역시엔 소아 응급의료서비스가 가능한 병원이 없다는 거였다. 부산·울산·경남 광역권에 P대학교 양산병원에서만 소아응급진료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했다. 부울경에 모두 6개의 의과대학과, 이들 대학이 운영하는 대형병원만도 10여 곳에 이르지만 딱 P대 양산병원만 소아 응급의료서비스가 가능할 뿐이라고. 젊은 부부들이 안심하게
드라마를 즐겨본다. 작가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교묘하게 만들어놓은 비현실적인 장치에 매번 빠져들어서다. 최근 봤던 드라마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드라마와 현실이 분간이 안 되는, 그래서 등장인물에게 철저히 빙의되는 경험을 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건강의학과 근무를 처음 하게 된 간호사 정다은이 정신병동 안에서 만나는 세상과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렸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 이들이 없더라는 걸 이 드라마가 일깨웠다.공황장애에 시달리다 끝내 회사를 떠나야 했던 다은이
2019년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를 보면 위암은 전체 암 중에서 발생빈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흔한 암이다. 발생 부위에 따라 수술 난이도와 예후가 달라지며, 위의 상부에 생긴 암일수록 수술이 어렵고 예후 또한 좋지 않다. 특히 식도와 위의 연결 부위 근처에 생긴 분문부(噴門部) 위암의 치료가 가장 까다롭다. 분문부 위암은 최근 식생활의 서구화로 증가하는 추세다. 발생 요인은 다양하나 환자 빈도수가 높은 서구에서는 비만과 더불어 잦은 위 식도 역류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는다.암 치료의 기본은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다. 이
해바라기 병원 앞 옹벽을 끼고 있는 인도 철제 울타리를 따라서 해바라기 스무여 그루가 줄지어 서있다. 옹벽 위 해바라기는 아래쪽 큰 도로에서 차들이 쌩쌩 내달릴 때마다 이파리를 펼쳐서 메케한 매연한 막으려 애써보지만 역부족이다. 보름달보다 더 둥근 얼굴은 누렇게 뜬 채 연신 재채기로 몸을 바르르 떨어댄다. 꽃자루에 촘촘히 박힌 열매들은 추위가 오기 전에 야물어야 해서 흔들리는 몸을 겨우 곧추세워 구름 속 희미한 태양을 쫓는다.옛날 시골집 담 울타리에 해바라기 씨를 심었다. ‘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
서리 시골 고향으로 귀촌한 형과 오랜만에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눴다.“어제 오늘 서리가 와서 냉해가 좀 왔다.”“아이고, 서리가 벌써.”“그러게 날씨가 정말 예측불허다. 계속 덥다가도 갑자기 하얀 서리가 완전 뒤덮네.”“고구마 밭 다 말라 비틀어졌겠네요.”“고구마는 벌써 캤지. 지금은 콩 종류와 단감. 단감 농사하는 사람들이 걱정 많지.”“서리 맞으면 물러터지겠네요, …”하얀 서리로 뒤덮인 들판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막 타작 끝낸 벼논이 이른 아침 동녘 하늘에서 솟구친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논두렁을 타고 가는 콩잎들이
백내장 수술 눈이 급격히 침침해졌다. PC를 사용할 때엔 화면을 확대하거나, 글자를 키워서 그럭저럭 임기응변으로 하루하루를 때웠다. 강도 높은 돋보기로도 점점 컴퓨터 화면 속 글자들은 가물거렸고, 확인하려는 나는 목 고개를 점점 화면 속으로 빠져들 듯 들이미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5월 정근안과병원에서 진단받은 백내장 수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깊어가는 가을만큼이나 내 백내장도 익어간 것이다.잠시 10분 안에 끝나는 수술이라며 의료진들이 안심시켰지만, 막상 수술대 위에 누우니 온갖 공포가 스멀거렸다. 미리 신경안정제를
정말 기적이네요! 지난 수요일 오전 10시. 두 장의 사진과 함께 병원장의 메시지가 단톡방에 올라왔다. 16년 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지마비에 의사소통까지 불가능하던 올해 일흔 살 요양병원 환자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는 거다. 일과처럼 회진을 하던 병원장의 인사말에 그가 뜻밖에도 “감사합니다!” 하고 대꾸를 했다. 오랜 투병으로 피골이 상접한 그의 말은 어눌했지만 의미는 너무나 또렷이 전달됐다. 그는 2006년 1월 24일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심각한 뇌손상으로 인해 사지마비에다 의식마저 혼탁해져 세상과 단절돼 버렸다
가을나들이 자동차가 교외를 벗어나자마자 가을 속으로 두어 걸음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여전히 짙은 녹음 속에서 빼꼼 얼굴 내미는 단풍들이 그지없이 곱디곱다. 짓궂은 태풍에 성급하게 이파리 놓쳐버린 탓에 정수리 허전한 초로를 떠올리게 하지만 가로수들은 결코 추레한 모습이 아니다. 낙동강을 곁에 끼고서 내달리는 차창 너머엔 때때로 깊은 가을의 동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석양으로 치닫는 가을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눈부신 홍시 어깨 너머로 부산스런 엄마의 가을걷이 손길이 푸석하기만 한 내 가슴속을 따스하게 적신
부산어묵 맛있지요 지하철 역사 안으로 서둘러 기어든다. 끈질기게 뒤따라 들어오던 한기가 비로소 문턱에 걸려 넘어진다. 역사 안 어묵가게의 온기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한기가 저지당한 셈이다. 가게 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문턱에 걸려 넘어진 한기를 놀리기라도 하듯 맛깔스럽게. 무릎 까진 한기가 골이 났는지 무거운 엉덩이를 치켜들고선 어묵가게 안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서려 한다. 가게 안에서 선채 어묵을 씹으면서 새벽 한기를 달래던 중년이 바늘 바람 틈새마저 지워버린다. 탁! 어묵가게 문이 꽉 닫혔고, 갇힌 한 올 한기는
온천천 작은 갈대밭 온천천에 갈대꽃이 피었다. 활짝 핀 갈대꽃이 해거름 석양을 받아 세상 온기를 품고 있다. 좁은 개울 한 가운데에 조성된 갈대밭은 이즈음 온천천의 평온한 쉼터다. 우거진 갈대 속에는 올해 태어난 오리들이 밤마다 숨어들어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장난치고 놀다가 심심하다 싶으면 또래들과 함께 갈대 뿌리를 꺾어다가 잘근잘근 씹는다. 달달한 뒷맛에 오리들은 간식 삼아 틈틈이 갈대뿌리를 사냥하는 게 일과가 됐다. 물속 깊이 뻗어간 갈대 뿌리엔 커다란 잉어들의 보금자리다. 헤엄치다 지치면 갈대뿌리 속으로 파고들어 가쁜
칠순 두 노인의 대화 본격 걷기 전 늦은 끼니를 때우려 식당에 들렀다. 맛 집이어서인지 가뜩이나 좁아 보이는 홀이 몹시 붐볐다. 방금 손님 떠난 빈자리에 겨우 비집고 앉을 수 있었다. 홀은 시끌벅적했다. 식사를 하는 이나, 음식을 기다리는 이 모두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시국얘기를 거나하게. 내 옆자리엔 친구사이로 보이는 칠순 어르신 두 분이 돼지국밥을 놓고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말쑥한 차림새에다, 얼굴에서도 찌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밝았다. 두 분의 대화가 내 귀로 흘러들었다.“난 요즘 텔레비전 뉴스 안 본다.
기다리면 되는 거야? 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임차인에게 전하던 아내가 조금 심사가 뒤틀렸던 모양이다. 딴엔 몇 년간 정 던 데다 지난해 이 일대 집값 폭등 때 단 돈 1원도 전세 인상에 반영하지 않은 ‘착한 집주인’으로라도 인식돼서 최소한 ‘아쉽다’는 반응쯤을 기대했으나 아니더란다. 그래요? 집을 내 놓았군요, 우리는 당분가 지켜보려고 해요, 집값이 계속 떨어질 거라고도 하고요. 아내가 맨 처음 전화로 임차인에게 아파트 처분 소식을 전한 데엔 어쨌든 기득권을 인정해서라도 그에게 우선권을 기쁘게 안기고 싶어서였을 텐데. 상대는 아내의
1주일만의 온천천 걷기 몹시 걷고 싶었다. 퇴근길 온천장 지하철역에서 무작정 내렸다. 입원치료로 지친데다 끼니를 거른 터에 허기까지 겹쳐 평소 같았으면 걷기를 포기했을 거다. 어둠이 자작하게 내린 온천천은 포근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조금은 서늘한 기운을 기대했는데…. 갈맷길을 메운 사람들의 발길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분주했다. 지하철 역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어둠에 공명 져서 더욱 크게 들려오는 듯하다. 요 며칠, 늘 마주치던 얼굴을 보지 못해 걱정스런 낯빛의 개울물은 가슴으로 물소리를 잔뜩 끌어안았다. 개울 품속에 숨 막힐 듯
11월 불꽃놀이 한글날 휴일 병실에서 TV로 뉴스를 시청한다. 유일하게 바깥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코로나로 중단됐던 서울의 불꽃놀이 영상이 화면을 화려하게, 눈부시게 밤하늘을 수놓는다. 그동안 코로나에 삶이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가을 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불꽃에 탄성을 지르고,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한다. 올해의 서울 불꽃축제 주제는 ‘We Hope Again!’. 코로나로 지친 일상을 다시 희망을 불꽃으로 피워 올리자는 뜻일까. 10월 서울의 불꽃축제 여세를 신호탄으로 아시아 최대 불꽃쇼가 11월초 광안리해
좋은 사람의 조건 늦은 퇴근길. 병원 앞 지하철역 승강장 스크린도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이 몹시 지쳐 보인다. 오늘 하루도 빼곡한 일정 속에 숱한 이들을 만났다. 마음 편히 환담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모를까. 서로 속내를 감춘 채 제 욕심의 극대화를 노리는 이들과의 만남은 늘 일생을 걸듯 최대의 소모전을 짐작해야 한다. 가용 가능한 모든 신경세포들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하다 보면 파김치가 된 유리창 속 인물은 어느새 허상을 쫓는 불나방에 다름 아니다. 이럴 때 여름철 한줄기 소나기처럼 청량감을 주는 게 있었으니
떨어진 머리카락 샤워를 끝내고 손바닥으로 배수구 위를 훑는다. 잘 띄지 않던 머리카락들이 눈앞에 드러난다. 길이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희끗한 색깔로서 머리카락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졌다. 한때 샤워장을 함께 사용하는 큰애 것으로 우겨본 적도 있었다. 그만큼 내 모공은 건강했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들은 강했으니까. 당연히 짙은 머리숱이 영원할 거라 여겼는데…. 머리를 감을 때 내 손가락의 힘에 의해 중간이 끊어진 것들이면 차라리 좋겠다는 마음은 이런 내 바람이 비쳐진 걸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쓸어 담으면서 깊이 생각에
바지 단추들 유년시절 바지는 고무줄 한 가닥으로 지탱했다. 냇가나 우물가에 앉아 방망이로 두드려대는 빨래를 하다보면 바지의 고무줄도 쉽게 상했다. 밖에서 정신없이 뛰놀다 느닷없이 바지가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는 낭패를 당한 내 또래들이 적지 않았다. 허리띠 역할을 하는 바지의 검은 고무줄은, 요즘 제품과는 달리 탄력성이 크게 떨어졌다. 장난삼아 몇 번 잡아당기다 보면 느슨하게 늘어질 정도였다. 더 이상 흘러내려 엉덩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면 바지의 허리띠가 필요했다. 천으로 만든 띠를 주로 사용했다. 때로 피치 못할 응급상황에서는 볏짚
안타까운 영끌족 ‘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해’ 집 샀던 젊은이들이 맨붕이란다. 미국 연준이 ‘성킁성큼’ 내딛는 ‘자이언트스텝’으로 인하 고금리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다. 한때 자신만 빠지면 또래 집단으로부터 외계인 취급을 당하며 따돌림이라도 당할 기세로 유행병처럼 번졌던 코인이나 주식투자도 차라리 반 토막 났다는 몇 달의 전의 뉴스조차 그립단다. 부쩍 오른 대출금을 지불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다시 옛날의 고시원 쪽에 월세자리를 알아보는 젊은이도 있단다. 다들 사정이 뻔한 지라, 영끌족이 내놓은 전세방에 관
고독의 시간 세상이 공허하기만 하다. 일평생 동행하는 의, 식, 주마저도 귀찮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오랜 동행친구 중에서도 ‘식(食)’에 대한 무덤덤함이 무엇보다 힘들다. 가뜩이나 갇힌 삶이어서 우울감이 더해지는데, 먹는 것조차 심드렁해지고 아예 음식냄새조차 싫어진다. 아까 누군가가 주고간 달콤한 빵 조각이라도 싸해진 입맛 앞에서 격한 시위라도 펼쳐보이고 싶다만 굳이 그럴 마음까지 들지 않는다. 매일 아침 먹는 사과 한 조각도, 거실 티비 앞에서 드라마에 빠져 오도독 씹던 아몬드도 자꾸 목에 걸린다. 만사에 의욕이 내 몸속을 빠져나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는 1924년 일제 때 경남 사천시 작은 산골마을 노루밭에서 태어났다. ‘고상욱씨’도 이보다 좀 늦었지만, 역시 나라의 주인은 일제였다. ‘고상욱씨’의 고향은 전남 구례군 반내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스물 즈음 일제의 강제징집으로 제주도에서 기마훈련을 받고 동남아전선에 투입되기 직전 해방을 맞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고상욱씨’도 어린 나이에 강제징집 될 찰나 ‘국민학교’ 일본인 교장의 선의로 모면했다. 해방 직후 나라를 되찾은 아버지와 ‘고상욱씨’들은 좌와 우, 둘로 쪼개져 피터지게 싸웠다. 1950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