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입원환자 식사 식사를 가져왔다. 널찍한 식판에 담아올 줄 알았는데,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져 있다. 따뜻한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은 네 가지였다. 반찬류는 마파두부, 배추김치, 콩나물무침, 갈치조림이었다. 일일이 여섯 개의 용기에 식사를 담아내느라 애쓴 식당직원들의 수고가 눈에 선하다. 어쩔 수 없이 늘어난 노동이었다. 코로나 같은 감염병 환자의 식기는 일반식기와 분리해서 사용해야 해서다. 그렇다고 식사 내용물이 다르지 않단다. 식판으로 먹는 일반 입원환자들과 같은 메뉴라는 걸 잊지 않고 강조한다. 또 하나, 식사가 끝
코로나 두 번째 확진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정식 초대받았다. VIP로. 좋은 자리여서 레드카펫을 지나가는 유명스타들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단다. 덤으로 행사가 끝나자마자 현장에서 상영되는 개막작품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미리 올해 개막작품이 어떤 건지 알아보는 등 어린 시절 소풍이나 운동회 날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즐거웠다.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해 2년간의 구금생활(?)에서 해방돼 마스크를 벗은 채 야외 개막행사가 이뤄진다니,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까. 회사로 우송돼온 VIP초대장을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삼광 보리밥 식당 황량하기만 한 허허벌판에 그들만 동그마니 남았다. 시뻘건 석양 뒤에 춥고 깊은 어둠이 똬리를 틀며 숨죽이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 제살이 에이는 추위를 견뎌야만 했다. 섣부른 춘정(春情)에 못내 겨운 동면 개구리를 따라나섰다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아이들의 보살핌을 받고 기사회생했다. 조그마한 발길들이 허허벌판 위에서 발가벗은 채 떨고 있는 그들을 잘근잘근 밟았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다시 꽁꽁 언 땅에 바짝 엎드린 채 혹독한 한파와 싸웠다. 따뜻한 봄날, 만물이 생동할 즈음 밥상 위엔 혹독한 허기의 겨울이 덮쳤
금목서의 짧은 최후 정녕 우리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향기인가. 딱 하루 만에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의 발치엔 황금색 꽃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강한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떨어진 금목서 꽃잎들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위에 빗줄기까지 쏟아져 내리면서 땅바닥에 찰싹 뒤엉겨 있었다. 땅바닥에 꽉 붙들린 향기는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옴짝달싹 못한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한없이 처량하기만 하다. 두 개의 큰 태풍이 잇따라 지나간 다음에 작은 황금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금목서가 너무도 반가웠다. 5년 만에 기다림이라 그 흥
초보운전 막 운전대를 잡은 큰애의 차에 시승했다. 10여 년 전 면허를 따자마자 장롱 속에 묻어뒀던 탓에 그의 차는 엉금엉금 기는 수준이다.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 초보여서 속도감이 더 떨어지게 느껴진다. 이따금 아이의 차가 도로 소통에 방해되는지 빵빵,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도 있다. 그들은 어김없이 우리 차를 앞지르면서 운전석의 큰애를 힐끔 쳐다본다. 아이가 등에다 ‘초보’라고 이실직고했으므로 긴 설명이 필요 없지만, 경적을 울린 이가 미사일처럼 쏘아붙이는 경멸에 찬 눈총세례는 오롯이 감수해야 한다. 함께 탔던 내가
대낮처럼 환한 야간 골프장 밤중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창 안으로 환한 불빛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피로감에 처져 있던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려서는 얼른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양산의 산 쪽에서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침침한 눈동자의 기능을 잔뜩 끌어올리려고 미간을 찌푸려서 초점을 불빛 쪽으로 맞췄다. 차도 점점 불빛 쪽과 거리를 좁혔다. 서치라이트였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조성된 골프장에 설치돼 있었다. 강력한 불빛 아래에는 골프채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사람 몇몇이 눈동자에 포착됐다. 밤 10시, 골프장 일대는 대낮처럼
후각 만세!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마스크를 벗는다. 자연스럽게, 익숙한 오랜 버릇처럼. 모처럼 구름 마스크를 벗고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어둠에 짓눌려있던 냄새들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풀벌레 소리가 청각을 깨우지만, 콧속으로 스미는 후각만큼 강할 수 없다. 다소 눅진하고 큼큼한 마른 풀내 틈새로 달콤한 향이 헤집고 들어온다. 출근길 내리막길을 한걸음씩 뗄 때마다 점점 달달해지는 느낌이다 그럴수록 내 안의 욕심에 이끌려 콧구멍을 더욱 벌름거리게 된다. 아, 취한다! 향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파트단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포항은 포항제철, 또는 포스코로 대변되는 철의 도시다. 인접한 울산과 더불어 대한민국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한밤중에도 쉼 없이 솟아오르는 공단의 불기둥에서 ‘가난했던 우리’는 영원히 지지 않을 선진국과 경제대국의 태양을 꿈꿨다. 며칠 전 포항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유년에 삼국유사에서 읽었던 설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야기가 거기서 천년 세월을 공단의 불기둥처럼 재현되고 있는 게 아닌가. 나에게서 포항이라면 ‘鍊吾郞’이나 ‘쇠오녀’의 이미지여서 무척이나 놀랐다. 나
도토리 줍기 산기슭에는 가을이 쌓인다. 울긋불긋 이파리들이 서둘러 길손들에게 달려든다. 단풍이라기보다 아직 낙엽에 가깝지만 메마른 가슴 속을 촉촉이 적실만큼 감동의 습기를 충분히 품고 있다. 이름 모를 가을꽃들도 길섶에 줄지어 서있다. 함께 걷던 아내의 손길이 분주하다. 길섶 곳곳에서 어르신들이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뭔가를 찾고 있다. 떨어진 이파리들을 뒤져 속을 더듬고 있다. 꽃망울 매단 키 작은 풀 더미 속도 헤치고 있다. 가을 도토리를 줍고 있다. 이미 작은 비닐봉지가 터질듯 도토리들이 담겨져 있다. 아직 성에 차지 않은지
들기름 보관법 거실 주방 냉장고를 열었다. 입구 쪽에 놓인 들기름 병이 눈에 띈다. 퇴직 이후 귀향해 시골집에 살고 있는 형이 며칠 전 직접 수확해서 짜낸 거라며 참기름과 들기름을 한 병씩 줬다. 기름병을 건네면서 형은 한 가지 신신당부를 했다. 참기름은 밖에 둬도 되지만, 들기름 병은 꼭 냉장 보관해야 한다고. 기름이면 그냥 상온 보관해도 되지 않나 싶어 그 이유를 형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바빠서 관뒀다. 참깨와 들깨에서 추출하는 참기름과 들기름인데 왜 굳이 들기름만 냉장 보관하라는 거지. 냉장고의 들기름 병을 바라보다 사이버지식
달맞이 길 위의 지하건물들 해운대는 대한팔경의 하나로 알려질 만큼 예부터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동해남부선 폐선에 들어선 블루라인이 명물로 부상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해운대 절경 중에서도 손꼽히는 달맞이일대에 식당이나 숙박시설, 커피숍 건물들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와우산 고개 마루 근처 6∼8층짜리 신축건물에서는 장사할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산 정상 부근치고는 건축물 층수가 높다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대개 2층까지는 지하층으로 돼 있다. 분명히 인접한
팬데믹의 끝이 보이지만 월요일부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드디어 코로나 팬데믹의 끝이 보인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방역당국에서는 눈에 띄는 확진자 감소세와 낮은 치명률을 근거로 조만간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게 할 모양이다. 끝 모를 어둠의 터널에서 헤맸던 우리의 일상이 조만간 제 모습을 찾게 될 것 같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다보니 미세한 기온 차이에도 민감해진다. 요 며칠 전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가 한여름 더위에 찌들었던 나는 무척 반가웠지만, 불청객도 따라붙었을 줄이야. 느닷없이 아침부터 콧물이 주르르,
상징의 몰락 온천천 갈맷길 길손을 가장 먼저 반기는 이가 비둘기. ‘위험동물’인 내가 다가서도 비둘기들은 구구!, 거리면서 목례를 올리기 바쁘다. 감히 지존인 ‘사람’을 무시하는 그 무례함에 경종이라도 울리려고 나는 발걸음을 쿵쾅거린다. 녀석들이 짧은 다리로 오종종 서너 걸음 물러나는 시늉을 하고서는 이내 내 주변을 졸졸 따른다. 조용히 뒤따르던 녀석들이 갑자기 푸다닥!, 소리를 일으키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이미 주변의 다른 비둘기들도 어느 한곳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분이 비둘기 떼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땅위에 흩
가을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파트 옹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이 어느새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울긋불긋 단장한 담쟁이 잎의 밝은 기운이 녹음에 가려졌던 옹벽의 강건한 육신을 드러낸다. 뙤약볕 작열하는 한여름 가녀린 팔과 손만으로 직각으로 깎아지른 옹벽을 탔을 게다. 담쟁이는 하루에 한 뼘씩, 조금씩조금씩! 힘에 부쳐 옹벽을 움켜쥔 두 손을 그냥 놔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떨쳐냈다. 그럴 때마다 뒤따라 오르는 동료들이 앞선 이의 엉덩이를 떠받쳐주었다. 뒤쳐진 이가 기운 빠져 포기하려할 땐 위에서 앞장서 가는 이들이 혼신을 다해 발
태풍 난마돌과 함께 오른 출근길 지난 월요일 아침 출근길. 태풍도 이른 새벽부터 한반도로 출근했다. 2주일 전과 이름만 바뀌었을 뿐 험상궂기는 마찬가지. 하긴 저급한 그 이름에서부터 그들 속성이 어떤지 잔뜩 풍기고 있지 않은가. 2주일 전 녀석의 이름은 ‘힌남노’. 우리로서는 발음하기조차 상그러워 웃지 못 할 촌극을 빚기도 했다. 한국남성을 벌레에 비하하는, ‘한남충’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버린 우리 언론이 태풍 ‘힌남노’를 ‘한남노’로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 ‘힌남노’의 기세는 강력했다. 초속 40m가 넘는 강풍에다 시간당 100㎜
가을의 여유 성급하게 풋 단장한 얼굴부터 내민다. 아직 어설픈 화장술이지만, 초등학생이 엄마 립스틱으로 제 입술에 그린 듯 깜찍하다. 길 위에도 노란 낙엽들이 하나둘 나뒹굴고 있다. 바스락! 지려 밟히는 소리가 낭만적이다. 길섶 화단 위에도 지난 태풍에 떨어진 이파리들이 시들어가고 있다. 푸른 나뭇가지 위에서 서둘러 단장한 동료를 부러워하면서 경외감을 갖고 쳐다보고 있다. 시든 이파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아래의 생명들은 다가오는 추운 겨울나기를 위해 이불 삼아 꼭 끌어안는다. 시든 이파리의 모성을 알아보는 일은 세상
자식의 짐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막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다. 사람 목숨을 놓고 1분 1초를 다투는 데서 일해서 그런지, 환자의 상태가 아들의 심리까지 지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추석 연휴동안 응급 콜이 있을 때마다 아이는 전화를 걸어왔다. 치료 후 환자상태가 좋으면 밝은 목소리고, 그렇지 못하면 급 우울해한다. 특히 환자의 상태가 안 좋은 데다 나이까지 제 아비나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라면 더욱 힘들어한다. 아마도 환자와 제 부모를 빙의하는 듯했다. 며칠 전에도 막내가 전화로 제 엄마에게 응급환자 얘기를 꺼내면서 하소연하
가을 동거인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특히 밤중 기온이 섭씨 20도 언저리에 이르면서 가을 연주는 더욱 우렁차다. 풀벌레 소리는 한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 쏟아져 내리는 매미소리 만큼이나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조화롭다. 어느 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면, 곧이어 여기저기서 우르르, 탕탕! 하고 뙤약볕을 피해서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때로는 꽹과리처럼, 징소리처럼, 북소리처럼, 바이올린 선율처럼, 피아노연주처럼 제각각 달리 들려온다. 연주자의 악기가 바뀐 건 아니다. 언제나 같은 악기로 연
스테비아 토마토 며칠 전 새벽 집으로 방울토마토가 배송됐다. 토마토가 든 상자는 냉동식품 운반 때 사용하는 드라이아이스로 채워져 있었다. 토마토든 방울토마토든 매달 수차례 주문해왔지만, 드라이아이스로 냉동 보관돼 배송된 적은 없었다. 뭐지? 아내가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며 이름을 늘어놓았다. ‘토마토’라는 마지막 단어만 들리고, 앞에 영어로 된 말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 방울토마토는 매우 달달하고, 신선하다고 했다. 유전자변형 식품이라는 말에 찜찜하기도 했지만, 물로 씻으면서 하나를 깨물어보았다. 엄청 달달했다. 스테비아
익어가는 만물 한낮 온천천 갈맷길은 뜨거웠다. 구름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볕이 약해진 늙은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지만, 후텁지근한 뒤끝의 칙칙함은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살갗에 내린 햇볕이 몸속의 칙칙한 잡념을 말리고, 머릿속을 뽀송뽀송하게 한다. 낮은 담장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민 감들이 햇볕을 받아 번질번질 녹색윤기가 자르르하다. 떫은맛을 잔뜩 품고 있는 타닌(tannin)세포들이 햇살 좋은 ‘가을’이라는 당밀로 달달해지고 있다. 풋감위에 노란 기운이 상강(霜降)의 서리처럼 내려앉는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