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 인사 요즘 출근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다. 늘 시간에 쫓기는 터라 짐짓 아는 체하며 인사 붙이는 그가 마냥 달가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외면하면 야박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그를 못 본 척 지나지자, 이젠 아예 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서서 얼굴까지 부비며 반갑게 인사하지 않은가. 눈감은 봉사가 아니라면 그의 지극한 예의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오늘 아침에서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였다. 고개 숙이며 얼굴을 내 코앞까지 내미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그의 얼굴이 더욱 더 발그레해지는 것 같아
어린이 보호구역 아파트단지 앞 도로의 신호등이 옷을 갈아입었다. 검정색에서 노란색으로.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다. 익숙해질 때까지 그렇겠지. 신호등 색깔을 바꾼 이유는 물론 넉넉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일 터이다. 신호등 불빛 색깔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덮개까지 노란색으로 바꾼 뜻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노란 신호등이 설치돼 있는 곳은 어린이보호구역이므로 모든 차량들은 신호등 불빛이 빨강이든, 노랑이든, 파랑이든 무조건 ‘일단 정지!’ 하라는 의미일까. 우리 아파트 앞 도로를 거쳐
미륵이라는 말은 희망을 뜻하기도 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를 음역(音譯) 한 것입니다. 미륵은 희망의 상징어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이고 그리움의 대상입니다.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민중은 미륵을 찾았습니다.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미륵으로 비추어지기를 바랬습니다.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불에 기대어 세상을 개벽해 보고자 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미륵의 화신이라 자처했던 후백제의 임금 견훤은 재임 시에 금산사를 중창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열 명이나 두었습니다. 열 명의 아들 중 넷째인 금강을 총애해 그에게
한산도와 당항포 일대의 지명들은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과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왜군과 싸워 이긴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한산도 '문어포(問語浦)'에서 아군에게 쫓긴 왜군이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가르쳐 줄 리가 없습니다. 잘못된 길을 말했더니, 왜군은 이 말에 속아서 '속은섬'으로 갔습니다.퇴로가 막힌 '개미목'에서 다급해진 왜군은 산허리가 개미처럼 잘룩해질 정도로 길을 팠습니다.'두억리(頭億里)'에는 왜군의 머리가 엄청나게 많이 떨어졌는데, 헤아려 보니 억두였습니다.'매왜치'에다 왜군의 시체를
중국에 양보라는 청년이 무제보살(無際菩薩)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모님 곁을 떠나 사천 땅으로 향해 갔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그는 늙은 스님을 만났습니다. 늙은 스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시오?” 양보가 대답을 했습니다. "보살을 찾아가는 중이오." 그러자 스님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아예 부처를 찾아가시오.” 양보가 물었습니다. “부처가 어디 계십니까?” 늙은 스님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집에 가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오.” 양보가 늙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글을 초등학교에서 배웠어도 한글 자음의 이름에 대해 잘 모르거나 헛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많이 혼동하는 것이 기역, 디귿, 시옷입니다. 더욱이 외국인이 우리 글자를 배우고자 할 때는 일관적이지 못한 한글 자음의 이름을 익히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한글 자음에 이름을 붙인 이는 최세진(崔世珍․? ∼1542)입니다. 최세진은 아이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가르치면서 각 자음에다 고유한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 표기를 한자(漢字)로 적었습니다.그는 니은을 尼隱, 리을을 梨乙, 미음을 眉音, 비읍을 非邑, 이응을
한글 28자를 세종임금께서 친히 만드셨지만 '문자는 옛 전자를 본받았다 (字倣古篆)'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고 그동안 억측이 분분했습니다. 이 고전(古篆)을 파스파 문자, 범자, 서장 문자, 일본 신대 문자, 팔리 문자 혹은 중국의 전서체라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태극 사상에 기인한다거나 창호 상형에서 기원한다는 설들이 있었습니다. 1880년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간행된 (파울만 지음)라는 책에는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0년에 발견된 에서 '초성 글자의 기본 자는 발음기
도량(道場)은 수행자의 수행처를 말합니다. 오늘날은 불교 사찰만을 도량이라 부릅니다. 사찰 외의 곳은 한자어는 같이 쓰지만, 도장이라고 읽습니다. 도량은 늘 청정해야 하는데 청정한 도량을 위해 사찰은 새벽예불 전에 도량석이라는 의식을 행합니다. 도량석은 한 수행자가 천수경이나 금강경, 법성게 혹은 초발심자경문 등을 목탁에 맞추어 창(唱) 하면서 도량 안을 돌아다닙니다. 새벽 세시 무렵. 도량석은 만물의 잠을 깨우고 새벽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도량석 소리를 듣고 승방의 불이 하나둘씩 켜집니다. 수행자들은 가사를 추스르고 방문을 열고
고려 시대였습니다. 병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어려운 살림을 하던 운나라는 목공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대대로 도기를 만드는 집안의 도공이었는데 손재주가 좋아 건넛마을의 목수 영감으로부터 목공일을 배우게 되었고, 목수 영감의 딸 꽃님이 와도 약혼을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송악산의 관음사 창건에 강제 동원되어 노예처럼 일을 했습니다. 운나는 천정에 매다는 닫집과 문짝의 연꽃을 조각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의 조각 솜씨가 너무나 뛰어나서 관음사 스님들과 개경 관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관리
언어는 지극히 상대적입니다. 영어와 우리말이 다른 것은 낱말만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다르다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특히 종교라는 낱말을 보는 시각 차이는 엄청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보니 토속종교뿐만 아니라 외래 종교와 신흥종교까지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종교는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 죽음,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는 내적 에너지가 되고 있어 인류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보는 시각차 이 때문에 지금까지 지구상에는 종교분쟁이 끊임없이 일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김소월 시 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숨어 있습니다. 숨어있는 주어를 끄집어 내어서 시의 문장에 끼워 넣는다면 시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입니다. 주어가 없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주어를 쓰지 않는 것은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
최남선은 불교의 특성을 말하면서 "인도불교는 서 론 불교이고 중국불교는 각론 불교(종파불교)이며, 한국불교는 원효스님에 의해 서론과 각론이 종합된 통불교적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효(元曉․617~686)는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갖가지 종파 불교가 원효를 통해 하나의 진리에 귀납됐고 종합 정리되었으며 대립이 없는 차원 높은 불교의 사상체계가 세워졌습니다. 원효는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내용의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수행자의 삶과 속인의 삶마
김일성 주석이 1992년 개성의 고려 성균관을 방문해 "국자감이 나온 것이 992년이니 고려성균관의 창립연도를 그때부터 보면 올해가 1000년이 되는 해이므로, 지금 세계에서 제일 력사가 오래다고 하는 이딸리아의 빠르마종합대학(1064) 보다 70여년이나 앞서 창립된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력사를 가진 대학"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려 성균관은 설립 당시 국자감으로 불리다가 이후 성균감, 그리고 성균관으로 개칭되었습니다.고려 성균관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 인문 사회계 3개 학과와 율학, 서학, 산학 등 자연과학 기술계의 6개 단과
러시아의 위대한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1890~1938)가 쓴 는 여러 나라 언어의 음운학에 관계되는 전통적인 문제들을 처음으로 제기한 책입니다.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기념비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국어는 예삿소리, 된소리, 거센소리의 상관 묶음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묶음은 낱말 끝에서 중화되고 원음소는 내파음으로 실현된다는 사실도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트루베츠코이는 죽기 일주일 전까지 를 집필했지만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호롱 불 밑에서 책을 읽고 집필을
전원생활에서 당신은 어느 계절이 좋은가요? 나에게 물으면 봄과 가을과 겨울이 다 좋은데, 유독 여름만 싫다고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풀 때문입니다. 여름은 풀의 계절이고, 풀의 전성시대입니다. 시골집의 마당을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이유를 알겠어요. 흙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풀이 뿌리를 내립니다. 여름은 풀과의 전쟁 시즌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풀밭의 전사가 됩니다. 나도 풀밭의 전사입니다. 봄철에는 나와 풀은 화해무드입니다. 평화의 시대입니다. 풀은 나를 들판에 초대해서 냉이며 쑥, 취나물과 참나물을 바구니 채로 수북수북
그러니까 열 살 이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동네에 살았으니까요. 그 동네에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삼베옷을 입었고 얼굴은 홍안이었습니다. 하얀 수염을 흩날렸고, 하얀 상투머리였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달기가 있는 형의 할아버지라 몹시 의외였습니다. 그 건달과는 달리 노인을 존경 어린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노인은 들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에서 붕어를 낚아서 대야에 담았다가, 해거름녘에는 잡은 물고기들을 도랑에 도로 비웠습니다.내가 도랑에 갈 때마다 노인은 어김없이 낚시를 하고 있었고, 잡은 물고기를
며느리를 몹시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주 작은 솥을 주어 밥을 짓게 했습니다. 그 솥으로 며느리 몫까지 밥을 지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며느리는 맨 날 시어머니의 것과 남편의 밥을 푸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굶어죽었고 그 영혼이 새가 되어 '소쩍 소쩍'하고 울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로 시작되는 서정주 시 의 원문은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입니다. 소쩍새를 솥작새로 쓴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죽은 슬픈 소쩍
스위스 동쪽의 알프스 산자락에 상갈렌(St. Gallen)이라는 고도(古都)가 있습니다. 인구 7만 5,000명의 고색창연한 이 도시는 오늘날도 상갈렌 칸톤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동스위스 경제의 중심지입니다. 상갈렌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보다도 10만권 가량의 고서와 2,000권의 희귀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수도원 도서관(Stiftsbibliothek)입니다. 희귀 필사본의 대부분은 중세 초기와 중세 전성기에 수도승들에 의해 필사된 것들입니다. 이른바 15~16세기 상갈렌의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트루먼에 의해 보직이 해임된 맥아더의 고별사 (연방 상하원 합동 회의) 말미에 나오는 명언이다.몇 해 뒤 트루먼도 물러나고 의회 권력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가자 ‘맥아더 승진안’ 이 상정되었다. 원래 별 다섯은 종신 계급장으로 미 연방법에 의해 퇴역이 안 된다고 한다. 나이가 많아 보직만 주어지지 않을 뿐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그래서 법안 명칭이 ‘승진안’이 된 것이다. 영어로 '별 다섯'은 the general of the Army, '별 여섯'은 the general of the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왕은 태종(太宗, 1367~1422) 이방원이었다. 방번, 방석 어린 형제는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부터 처가 민씨 집안까지 완전히 도륙을 냈던 이방원이었다. 필자(筆者)는 지금도 그 잔인함에 차마 경어(敬語)를 쓸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왜 태종이라는 시호(諡號)가 붙었는지, 시호에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어 그 자식 이방원에게도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식이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