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11월인데 두툼한 옷가지를 하나 더 걸쳐 입고서 범어사 계곡 길에 나서야 하나 망설였다. 기온이 섭씨 16도까지 치솟아(?) 후드 티만 챙겨 입었다. 계곡에 들어서면서부터 등짝에 내리쬐는 햇살이 온몸을 데웠다. 목덜미까지 감쌌던 윗도리 지퍼를 배꼽으로 내렸다. 계곡은 조금씩 울긋불긋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늦어보였다. 계곡 곳곳에서 아우성치는 여름의 텃세 탓이다. 콸콸콸! 계곡의 함성은 여전히 우렁차다. 짙푸른 녹음을 뚫고 길손의 귓전을 사납게 때린다. 졸졸졸! 수채화처럼 가만히 흘러내리던 가을의 계곡이 그리워지는 건 또 무슨 조화람. 알록달록 때때옷 차려 입으려 한 해 내내 기다렸건만, 볼썽사납게 텃세 부리는 여름이 계절의 팔레트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노랑, 빨강, 갈색 물감이 수채화로 물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행여 무채색에 그 꿈이 휑하게 날릴까 두렵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손은 자연의 조화를 가로막는 여름의 텃세가 되레 부러울 따름이다. 이제 겨우 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아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늦가을의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헉헉! 등짝 넓은 여름의 짙은 녹음과 우람한 기세가 반갑지만, 상대적으로 점점 몸피 쪼그라드는 ‘늦가을’ 초로는 차라리 여름의 텃세라도 실컷 맞닥뜨리고 싶다. 앞서가던 ‘여름’이 발걸음을 멈추고, ‘늦가을’을 앞세운다. 제 뒤통수에서 헉헉대는 아비의 거친 숨소리가 안타까웠을까. 나이 듦이 점점 두려워지는 내게도 여름 텃세 같은 아들이 있어 이 늦가을이 그리 쓸쓸하지는 않다. 11월의 범어사 계곡엔 아직도 여름이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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