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에 전화가 걸려왔다. 출장 중 열차 안이어서 무시했다. 대화 목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수도 있고, 코로나 시대에 폐쇄된 공간에서 통화는 비말로 인한 감염 우려도 따지는 세태이지 않은가. 전화기의 진동이 그치지 않았다. 혹시 지인이 아파서 급히 나를 찾는 걸까. 최근 통째로 사라진 전화번호 탓에 절친일 수도 있어 전화를 받았다. “××야, 내 잘 모르겠제. ○○ 누나다!”

 

  고향의 집안 누나였다. 이리 단정하는 데엔 ‘○○’형의 이름이 거론돼서 가능한 일이었다. ‘누나’라지만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집성촌이었던 고향엔 친척들이 많았다. 설이나 추석명절, 시제 때면 ‘임씨’ 성을 가진 이들이 우글우글 몰려서 차례를 지내고 제를 올렸다. 남자들만 참가하는 의례인지라 촌수를 달리하는 형이나 남동생들의 이름과 얼굴은 여전히 또렷이 떠오른다. 누나나 여동생들의 이름과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하다.

 

가난했던 시절 누나나 여동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시로 내몰렸다. 상급학교로 진학은커녕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는 심산으로 봉제공장 ‘공순이’나 ‘식모’로 떠밀렸다.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살벌한 도회지 일터로 나선 누이들의 나이는 겨우 열 두셋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 품에 귀하게 안겨 살아온 아들들과는 달랐다. 예쁜 얼굴을 새기고 이름을 기억하기에는 하께 하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누나는 고관절을 다쳐 수술이 필요한 손자를 데리고 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오시겠단다. 도무지 70대 초반의 누나에게서 앳된 어린 얼굴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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