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가를 지키고 있던 나팔꽃이 진지 오래돼 혹시 열매라도 맺혔을까 살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꽃자루를 엄지와 검지 끝마디로 비볐다. 짙은 커피색 씨앗이 눈앞에 드러났다. 나팔 꽃씨였다. 야무진 매무새가 이미 내년 여름 우리 집 거실도 파란 나팔꽃으로 거칠어가는 내 마음을 달래주려나 보다. 본격 수확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다른 꽃자루들을 살펴보니 아직도 11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가면서 열심히 영글어가고 있었다.

 

  성급하게 수확한 꽃씨를 조심스레 나팔꽃이 기생하고 있는 군자란 화분 속에 숨기고, 대신 유년의 꽃씨 추억을 피워냈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이면 선생님이 풀씨나 꽃씨를 수집해서 학교로 가져오라는 숙제를 냈다. 풀씨는 키 작지만 쿠션감 좋은 잔디씨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하굣길 길섶이나 언덕빼기에 우르르 몰려가서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풀씨를 훑어서 편지봉투에 담았다. 성급하게 훑다가 잔디 옆에 껑충 서 있는 억새풀의 칼날 같은 예리한 잎새에 여린 손가락이 베인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꽃씨는 학교에 숙제로 제출하기보다는, 제 집이나 동네쯤 스스로 예쁘게 꾸며야한다는 순전히 새마을정신에 입각해서 그랬던 듯하다. 코스모스나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꽃씨를 모아뒀다가 이듬해 봄 집 담장 아래나 동내 길섶에 뿌리곤 했다.

 

  방금 화분 속에 숨긴 꽃씨는 내 마음을 알까. ‘꽃씨는 알까요? /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 딱딱한 땅을 / 뚫게 되리란 걸 // 꽃씨는 알까요? /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 세상을 물들이는 꽃이 되리란 걸 // 꽃씨는 알까요? / 정말 정말 조그마한 자기 몸이 /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 / 열쇠가 되리란 걸’ <안오일 ‘꽃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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