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속시원하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아들은 연신 통쾌하고 후련한 표정이다. 독립투사들을 지독히도 괴롭히던 매국노가 해방 이후에도 거들먹거리던 장면에선 토, 나올 뻔했다며 영화의 흥분이 그치질 않았다. 일요일 폭염을 피하려 영화관을 찾았다. 피서지를 고민하듯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에서 우린 설왕설래했다. 미남배우 톰 크루즈도, 성인동화 같은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도 우리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데 실패했다. 줄 서 있는 식당의 음식에 만족하지 않은 적 없듯이, 관객몰이에 성공하는 영화 역시 충분히 재미를 담보하지 않겠나 싶어 우린 ‘암살’을 선택해 더위사냥에 나섰다.

광복절을 코앞에 둔 시점에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우릴 몰입할 수 있게 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한일관계가 불편해지고 있는 만큼 일제 강점기의 영화 장면 하나하나가 온몸에 털을 곧추세웠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벌이는 의사(義士)들 앞에서 숙연해지는가 하면, 일제에 기생해 조국과 겨레에 칼끝을 겨누는 매국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치를 떨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냉방 속 심장은 자꾸 뜨거워진다. 때론 분노로, 때론 미안함으로, 때론 기쁨으로. 해방이 되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매국노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때 옆의 아들은 분기탱천했다. 그래 실제로 우리 역사는 이렇게 끝났었지. 묘한 배신의 찌꺼기가 내 몸을 휘감는 순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매국노 염석진을 향한 몇 발의 총성은 내 몸을 휘감고 있는 불편함과 무더위를 순식간에 암살해버렸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영화는 이래서 좋다. 지나간 ‘진실한’ 부당함과 배신도 모순처럼 살짝 비틀어댈 수 있으니까. 난 그날 내 맘 속에서, 역사가 배신자로 낙인찍은 매국노들을 통쾌하게 암살하기로 했다. 얼마 전 시인 강정의 글이 떠올랐다. “영화는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인다. 가공된 물성이 있고, 그로 인한 착각이 있고, 그로 인한 여운이 있다. 그건 삶에 대한 물리적 공작이다. 감각을 극대치로 올려 감각을 자극하고 허구를 극대치로 꾸며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천만 관객 시대’>” 여전히 떵떵거리고 사는 일제 앞잡이들을 가슴으로 암살하려는 내 삶의 물리적 공작쯤을 누가 벌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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