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며 인간은 의식주를 넘어서는 초월의 세계를 찾는다. 그게 사시사철 먹을 것만 찾는 여타 동물들과 인간이라는 동물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인간은 뒤꿈치를 든다. 처음에는 살짝, 그 다음에는 껑충껑충 들어 올린다. 죽음이라는 담장, 그 너머를 보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이것이 바로 ‘초월성’ 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상에 출현한 연대를 두고 여러 학설이 있다. 대략 40만 년 전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흑인이 출현했다는 게 공통적 학설이다. 그게 우리의 원조다. 

소위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이 붙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상하게도 이 동물은 의식주에 만족하지 않고 초월자 혹은 초월성을 찾는다. 종교는 거기에서 생겨났다.

그럼 왜 유일신인가? 기독교는 왜 초월자를 찾고, 불교는 왜 초월성을 찾는 걸까?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이에 대해 정신부는, 지리적 풍토가 종교의 성격을 결정하더라. 유일신 종교는 사막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중동에서 태동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일신의 계시를 받는 계시 종교다. 

그런데 아시아의 평원에서 태어난 종교는 이와 다르다. 평원에서 태어난 불교와 도교, 유교 등은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는다. 이러한 평원 종교는 인생에 대한 이치와 법칙을 찾아 나서는 이법(理法) 종교다. 

사막은 메마른 곳이다. 사람이 살기가 참 어렵다. 스스로 인생을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초월자를 찾게 된다. 그 초월자는 유일신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일신에게 가는 길도 한 길뿐이다. 

황량한 사막에서 살려면 오아시스를 찾아야 했다. 사막의 풍토를 보라. 광활한 사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아시스뿐이다.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 하나뿐이다. 

그러니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겠나. 생명을 주시는 분이니까.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이 대상 (隊商)의 길이다. 바로 생명의 길이다. 

황량한 사막에서 이 길을 벗어나면 어찌 되겠나. 죽음뿐이다. 그래서 길은 하나다. 오아시스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초월자도 한 분, 초월자에게 인도하는 구세주도 한 분, 예언자도 한 분이다. 

그럼 아시아의 평원에서 태동한 종교는 왜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나? 평야에서는 사람이 사막처럼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먹거리가 풍부하다. 

강도 있고 마실 물도 넉넉하다.사람이 살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초월자인 유일신을 찾아 나서지 않고, 초월성의 진리를 찾아 나서더라. 

절대 초월자는 우리 마음에 내재해 계신다. 여기서는 초월자와 초월성이 양분돼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통일돼 있다.

예수님은 613가지나 되는 까다로운 율법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엄격한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바꾸는 개혁을 하고자 하신 분이다. 

그래서 율법을 철칙으로 지키는 바리새인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인도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형형색색의 신상 (神像) 들을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있다. 그래서 인도는 신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부처님은 이러한 수많은 신들을 깨뜨리고 나 스스로 진리를 찾아 깨달음을 얻겠다는 개혁을 하신 거다. 

교회만 다닌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다  오히려 교리의 패러다임에 함몰되면, 자기 성찰을 통해 기독교 영성을 맛보는 게 어렵다.

초월자냐? 초월성이냐? 를 따지기 보다는 그저 ‘초월’이 핵심이라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어느 한 곳에만 머물거나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경계를 없애면 그만큼 깨달음을 빨리 얻어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87세 성서학자 정양모 신부
- [사람이 선물이다]中 , 조정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05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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