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단지가 온통 울긋불긋하다. 벚나무에 가려져 있던 단풍나무가 온전히 물든 채 내 눈 앞에 나타나 애교를 부리고 있다. 짙은 빨강에서부터 조금씩 파스텔톤으로 옅어져가는 연지곤지로 미처 단풍여행 떠나지 못한 주민들을 유혹하고 있다. 15층 아파트 중턱까지 자라버린 삼나무도 불그스레한 계절 옷으로 갈아입고, 껑충한 키에 수줍은 듯 지팡이 짚은 어르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세월에 굽어져가는 어르신은 삭정이 같은 목을 빼들고 붉게 물든 삼나무를 위태위태하게 쳐다본다. 단풍 든 삼나무 위로 향하는 할머니의 시선이 중간에 이미 헐벗어 앙상한 벚나무를 스칠 때 일순 눈동자에 쓸쓸함이 어른거린다. 한 줄기 석양빛이 할머니의 눈동자를 따스하게 달랜다. 월동준비 서두느라 일찍이 낙엽 떨궈낸 벚나무는 아직 등줄기 자작하게 하는 11월 햇볕이 야속하기만 하다. 단풍나무의 때늦은 단장을 곁에서 진득하게 기다려야 했으나 가을 비바람에 겨울 칼바람이 무서워 서둘러 월동준비를 해버렸다. 벚나무는 다시 한 번 참을성 없는 자신이 싫었다. 지난봄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개나리가 피면서 산수유와 목련이 덩달아서 꽃망울을 터뜨렸고, 겨울에 얼어붙은 사람들의 동심이 봄꽃 앞에서 풀릴 즈음 참다못한 벚나무가 팝콘 터지듯 봄을 가득 채웠다. 서두르는 상춘 길에 사람들이 연분홍 감흥을 가슴속에 추억으로 쟁여둘 즈음, 벚꽃은 팝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쉬웠다. 벚나무, 꽃도 급히 지더니, 단풍마저 이리도 서두느냐. 인공적인 단풍나무보다는 벚나무의 단풍을 더 사랑하는 이의 가을 상념이 결국 앞선 봄의 부채(負債)마저 그에게 들이미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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