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장군(Douglas MacArthur)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트루먼에 의해 보직이 해임된 맥아더의 고별사 (연방 상하원 합동 회의) 말미에 나오는 명언이다.

몇 해 뒤 트루먼도 물러나고 의회 권력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가자  ‘맥아더 승진안’ 이 상정되었다. 원래 별 다섯은 종신 계급장으로 미 연방법에 의해 퇴역이 안 된다고 한다. 

나이가 많아 보직만 주어지지 않을 뿐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그래서 법안 명칭이 ‘승진안’이 된 것이다. 영어로 '별 다섯'은  the general of the Army, '별 여섯'은  the general of the Armies 이라고 한다.

기자들이 은퇴한 트루먼에게 달려가 질문공세를 폈다.  “맥아더 승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트루먼은 주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건국 이후 미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군 전략가임이 분명하다. 별 여섯개 충분히 자격이 있다. 그러나 또 다시 (군 통수권자인 나에게) 도전한다면 나는 맹세코 해임시키겠다.”

맥아더 자신은 어떤 말을 남겼을까. “내가 어찌 감히 '조지 워싱턴'과 계급이 같을 수 있느냐. 그러고 이 늙은이가 별을 더 달아서 뭣에 쓰겠느냐.”

조지 워싱턴은 비록 상징적이지만 미국의 영원한 군서열 1위다, (2차 대전때 별 다섯개가 나오자 워싱턴은 이후 별 여섯으로 특별 승진했다.) 

맥아더가 거부한 탓에 그의 승진안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맥아더는 케네디만 빼고는 역대 대통령들과 늘 불화하고 반목했다.

린든 B. 존슨과도 그랬다. 케네디가 암살 당해 운 좋게 대통령 직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존슨이 베트남전을 확대하자 맥아더는 수시로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말렸다. 

“한국전은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을 부추겨 일어났지만 베트남전은 자기네들 끼리의 내전입니다.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없습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속절없이 죽어가야 하나요.” 존슨은 맥아더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그래도 ‘영웅’을 홀대할 수는 없어, 맥아더가 노환으로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 입원하자 문안을 갔다. 그 자리에서도 ‘철군’을 당부한 맥아더에 슬그머니 화가 치민 존슨은 “장군, 몸조리 잘하세요” 하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당시 기록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고 쓰여 있다. 문병 한 달 후 맥아더는 끝내 눈을 감았다. 1964년 4월 5일. 보고를 받은 존슨은 즉각 애도 성명을 내며 7일간 미 전국에 국장을 선포했다.

시신은 당일 군 수송기편에 실려 뉴욕으로 보내졌다. 수도 워싱턴에서 사망했는데 웬 뉴욕행? 보직해임 후 맥아더 부부는 뉴욕의 6성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에서 살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지만 맥아더는 시쳇말로 똘똘하기는 커녕 허름한 집 한 채도 없었다. 

당시 아스토리아 호텔은 힐튼 가문 소유였고, 맥아더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힐튼 측이 선뜻 호텔 맨 꼭대기 펜트하우스를 내줬다. 

힐튼의 호의로 부부는 팔자에 없는 호강을 누린 셈이고, 방 값은 얼마나 됐을까? 공짜로 줄 수 없어 연 1 달러만 받았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라, 맥아더 부부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마련해 주고. 그래서 맥아더 시신은 뉴욕으로 운구 돼 국장 기간이 길어졌다.

뉴욕 군기지에 빈소가 마련돼, 각국 유엔 주재 대사들을 비롯해 뉴욕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을 이었다. 이어 특별 열차가 투입돼 시신을 다시 워싱턴으로 옮겼다. 

존슨 대통령 부부와 전임 대통령인 케네디를 대신해 로버트 케네디 부부가 열차에 올라 맥아더를 직접 ‘영접’했다. 

각군 의장대와 기수대, 웨스트포인트(육사) 생도대 등 수천의 병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장엄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시신이 안치된 의사당엔 그와 함께 싸웠던 옛 부하들과 시민 등 무려 15만명의 조문 인파가 몰렸다. 시신은 다시 군 수송기에 실려 버지니아주 노퍽의 맥아더 기념관으로 운구되었다. 

대통령은 이번에도 공항에 나와 맥아더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생전엔 그토록 미워했지만 영웅에 대한 배려엔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 지식백과 두산백과,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 The JoongAng, 맥아더, 핵무기 고집하다 퇴출? 한국전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중앙일보 박용한 기자 (업데이트 2020.03.01.)
- 네이브블로그, No pain No gain! 잊지말자. 맥아더와 백선엽 장군☆☆☆☆☆ Baumann (2021.08.17.)
- 네이브블로그, 돌담장 넘어... 좋은글 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 베트콩 (2020.09.07.)
- Cafe 경산향교 자유게시판, 맥아더 장군, 세계 최고의 군 전략가다. 현동환 (2020.10.03.)
- (사진) 유엔군 사령관 겸 극동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승리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정치적 선호가 올라갔고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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