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칼럼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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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5월 중순 하얀 찔레꽃이 지천에 늘려 있다. 언덕배기에도, 산기슭에도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다. 마스크 걷어낸 코끝으로 스며드는 그 향이 은은하지만, 실로 2년 만에 누리는 향연 아닌가. 곁에서 함께 걷고 있던 아내의 후각까지 이미 찔레꽃 향기에 이끌린 듯 언덕배기에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꽃송이에 코를 내밀고 있다. “향이 참 진하고 좋다!” 아내의 한 마디에 그동안 마스크 속에 갇혀 있던 짙은 향기의 기억까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나를 휘감는다. 아내가 찔례꽃 한 송이를 꺾어들자 활짝 핀 꽃잎들이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린다. 하얗게, 하얗게!

  찔레꽃이 이리 하얀데, 왜 붉다고 했을까. 왜 노랫말에도 있잖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하는. 아내가 하얀 찔레꽃을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 노래가 구군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내려고, 굳이 ‘하얀’ 꽃을 ‘붉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서러울 정도로 순박한’ 옛 연인을 머릿속에 그리며 찔레꽃을 따다가 그만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핏빛 꽃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촌놈인 내 정서를 제대로 알 길 없는 아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시골서 자란, 가난한 내 유년의 봄은 언제나 찔레와 함께 했다. 보리이삭이 펼 무렵 부뚜막의 독은 바닥을 드러냈다. 꽁보리밥으로 채운 배는 친구들과 몇 번의 뜀박질과 나뒹굴어댐으로써 이내 헛헛해졌다. 장독이나 찬장, 선반을 온통 뒤져봐도 주전부리는 없다. 들녘이나 산기슭에서 자가 조달해야 했다. 소나무나 찔레 같은 새순이 그 시절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영양 부실로 누렇게 뜬 얼굴에 홍조라도 감돌게 한 건 찔레 새순이 아니었을까. 금방 터뜨리기 직전의 찔레 꽃망울이 불그스레한 것도 유년 하얗게 배고팠던 기억이 숙성돼서 일까.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모처럼 상념에 빠져본다. 꼬르륵, 소리에 그 시절 최고의 별미였던 하얀 촌국수 한 그릇으로 때웠다. 하얀 찔레 향이 내 몸을 휘감으며 5월의 헛헛함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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