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와 힐데브란트 노래

카를대제의 대를 이어 루드비히가 신성로마제국의 두번째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아버지가 넖혀놓은 영토를 자식들에게 분배하는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러자 가급적 땅을 많이가지려고 하는 자식들과 분란이 일어났고, 황제는 평생동안 그 분란의 중심에서 시달리고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신앙과 정치를 구분하지 못할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였습니다. 후세사람들은 그를 경건왕 루드비히 (Ludwig der Fromme)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에 반하는 조카를 장님으로 만들어 사망케 하고는 신하들 앞에서 참회기도를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시도 때도없이 고해성사를 하였기때문에 신하들 눈에 황제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였습니다. 경건왕이라는 호칭에는 다분히 조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또 성서 혹은 신앙에 관계되는 서적 외의 불경한 것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실수까지 저질렀습니다. 카를대제가 이룩해 놓은 방대한 문학적 예술적 업적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하는데,  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이동 시대에 아버지와 아들간의 비운의 결투를 그린 <힐데브란트 노래>는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비록 페이지의 반쪽 밖에 전하지 않지만, 성경 책의 빈 공간에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루드비히에 의해 소실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진위논쟁을 벌이고 있는 <화랑세기>의 실존여부도 우리 역사의 경건주의와 관계 있을 수 있습니다.

책에는 신라시대 풍월주(風月主)의 계보와 삶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법흥왕의 복잡한 여자관계, 지소가 삼촌에게 시집을 가고,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이야기, 숙명궁주가 어머니의 애인을 사랑한 이야기, 구리지(仇利知)는 비량공과 왕비 벽화(碧花)가 뒷간에서 통정해 낳은 아이라는 소문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교의 경건주의가 500여년을 지배했던 사회입니다. 경건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진솔한 삶을 반영하고 있는 외설적 이야기는 좀체 기록으로 남기 힘들었습니다. 외설적 언어가 담긴 문학작품들이 익명으로 전승되어 오는 이유도 경건주의 사상에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최근에 알려진  <화랑세기>가 1300여년간의 역사를 지탱해온 진본이라면 기적 중의 기적일것입니다. 

 

이현도 글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1999년 7월29일자에 게재한 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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