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과 작용

이 세상에는 변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현상적이고 우연한 것들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추상적이고 잠재적이고 영원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을 지배해왔습니다.  

 

여름과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 오는데 그 여름 그 가을에 피고 진 그 꽃이나 나뭇잎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삶은 예나 지금이나 영속하는데 그 삶을 구성하는 개체들은 생멸을 반복한다는 것. 이와같은 만물의 두 속성을 플라톤은 이데아와 이데아의 그림자로 구분했습니다.   

 

중국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의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이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자어에서 형성자들의 조합을 보면 이들의 깊은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波濤)는 물의 현상이고 파도의 본질은 물입니다. 파도(波濤)라는 한자어에 들어 있는 피(皮)와 수(壽)를 걷어내면 삼수변인 물만 남습니다. 삼수변으로 표기된 물 그 자체가 이 글자의 본질입니다.  

 

삼수변과 조합된 피(皮)와 수(壽)는 언제든지 교체해서 물의 현상을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이 흘러갈 때 강(江)이라 하고, 물이 얼 때를 빙(氷)이라 하며, 물이 고이게 되면 담(潭)이라 합니다. 현상에 따라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본질은 언제나 물입니다.  

 

분노(忿怒)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는 마음의 현상이고 분노의 본질은 마음입니다. 분노라는 한자어에서 분(分)자와 노(奴)자를 들어내면 마음 심(心)자만 남습니다. 마음 심 그 자체가 이 글자의 본질입니다. 마음 심에 붙어있는 분(分)과 노(奴)도 언제든지 교체해서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희(憙), 마음이 슬프면 비(悲), 마음이 우울하면 수(愁)입니다. 기쁨, 슬픔, 우울의 본질은 언제나 마음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삼라만상의 이와 같은 본질과 그 본질의 작용을 체(體)와 용(用)으로 설명했습니다. 체는 영원한 것이고 순수한 것입니다. 용은 순간적인 것이고 응용적인 것입니다.  

 

이현도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1999년 7월 8일자에 게재했고,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에 이일광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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