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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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

 

  어르신 한 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꽤나 나이 들어 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여든넷이란다. 놀란 만큼 자기관리를 잘한 셈이다. 허리는 곧았고, 힘 있는 목소리에 발음마저 또록또록했다. 그가 내민 명함은 여백이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숱한 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내게 낯익은 데는 없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낌새를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손님대접을 위해 대화에 응했다. 예상했듯 한참 자기자랑만 늘어놓더니 불쑥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하나는 자기 이력서와 함께 여러 사회활동 내용을 담은 서류들이었다. 또 한 봉투에는, 방문 목적에 해당하는 사업계획서가 들어 있었다.

  내용이야 둘째 치고, 수십 장에 이르는 서류들은 한 결 같이 손 글씨로 작성돼 있었다. 그의 정성과 노력, 인내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글자는 큼직큼직했고, 필체는 반듯하고 힘이 느껴졌다. 컴퓨터·스마트폰이 익숙한 디지털 시대에 손 글씨는 점점 퇴장하고 있다. 나 또한 퇴화하는 나이 따라서 손수 쓰는 일이 줄어들었고, 대여섯 글자를 펜으로 쓰는 것조차 워낙 악필이어서 내가 써 놓고도 옆 사람에게 무슨 글자인지 물어야 하는 판이다. 삐뚤삐뚤한 내 손 글씨에 비하면 어르신의 손 글씨는 대한민국 국전에 내놓을 작품 수준이었다. 여든넷, 그를 장년 못지않게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핵심은, 꾸준한 운동과 엄격한 식단관리도 톡톡히 한 몫 하겠지만, 손수 볼펜이나 연필로 문서를 작성하는 오랜 ‘손 글씨 고집’이 아닐까.

  어르신의 아날로그 글씨엔 정성이 듬뿍 배여 있었으나, 이미 디지털문서에 익숙해져버린 내가 그의 손 글씨 사업계획서를 읽어내기란 수월치 않았다. 아쉽게도 몇 장 뒤적이다가 다시 봉투에 넣고 말았다. 손 글씨가 치매 예방에도 도움 된다니 나도 옛날 기자시절처럼 다시 수첩에 기록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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