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1931년생 양띠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맏딸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교직에 있다가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는 6.25  전쟁중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사흘간의 이야기로, 아버지가 교직시절 학교 문예지에 올린 글의 제목입니다. 이 글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이 일어났던 무렵, 중학교 6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경상남도 산청읍 내리  외동마을의 집에서 아버지는 별안간 인민군에 의해 잡혀와서 수십명의 청년들과 함께 줄을 지어 끌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인민군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인민군은 "반동분자, 반동분자"하면서 총으로 위협하며  윽박질렀습니다. 그리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는 총살을 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아버지는 끌려가면서도 이 대열에 냠아있으면 분명히 죽게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터벅터벅 걸어가면서도 일념으로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행렬이 산청읍을 지나서 오부면 소재지에 이르자, 마침내 인솔자가 "10분간 휴식"이라고 외쳤습니다. 대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휴식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인민군들은 자전거와 싸이카를 타고 왔다갔다 하며, 이탈자가 없는지 감시를 했습니다.

오부는 큰어머니네 친정집이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의 눈에 익은 동네로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동네를 벗어나면 아는 이는 없고 동네는 낯설고 기회는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탈출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야속하게도 추석을 앞둔 열나흩날 밤의 달빛은 너무 밝았습니다. 

감시하는 인민군이 때마침 소변을 하는 사이에 아버지는 슬슬 기어서,  재빠르게 길 건넛집의 담벼락 모퉁이에 붙었고 이어 그 집 변소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변소는 입구가 꺼적대기로 가리워져 있고, 푹 패여진 구덩이에 판자가 걸터져 있었습니다. 사투리로 통시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구덩이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통시에 걸쳐진 판자 아래에 몸을 감추고 바깥동정을 살폈습니다.

꺼적대기의 양쪽 틈사이로 환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습니다. 달빛은 통시에 걸쳐진 판자를 비추고, 판자에는 달빛이 있는 부분과 어둠이 선명한 명암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바깥에서는 "휴식끝"하는 외침소리와 함께 인원점검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누군가가 "한 명 도망이다"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마당에서 발자국소리가 뚜벅뚜벅 돌아다니더니, 그 소리는  변소쪽으로 다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간이 콩알만해졌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제 운명을 맡기겠습니다." 

인민군 한명이 숨어있는 변소의 꺼적대기를 확 열어제끼고 머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는 통시구덩이 속에 숨은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은 너무 너무 더디게 흘러 갔습니다. 발자국소리는 다시 마당을 한바퀴 돌아서 사립문 밖으로 되돌아 나갔습니다.  탕- 하고 총성이 한번 들렸습니다. 그리고 변소바깥의 도로에 있던 소란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주위는 고요해졌습니다.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풀벌레와 밤새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사히 변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큰어머니의 친정집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동무! 동무!" 하고 불렀습니다. 멈추어 섰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간이 덜컹 내려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무의식 중에 소리쳤습니다. "동무, 급합니다. 어머님의 병이 위독해서 밤중에 약을 구하러 가는 중이니, 전달해 놓고 나오지요." 

그리고는 전속력을 다해 내달렸습니다. 아버지의 두번째 탈출이 성공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큰어머니의 친정집에 도착해서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나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사방이 인민군들이라  꼼짝없이 잡혀가야할 운명이지만, 아버지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옆집의 담장을 넘었습니다. 밤 1시쯤 되었습니다. 마당을 지나 방문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습니다. "주인 계세요?" 그러자 방안에서 모기소리처럼 가날픈 할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아픈 사람이오. 젊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인민군이 다 데리고 갔소."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옆집이 형수의 친정집이라 피신하러 왔으니 나를 숨겨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병든 할머니는 그제서야 일어나서, "아이쿠, 젊은 양반, 얼마나 고생하셨수?"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어 할머니는 아버지를 큰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큰어머니는 당신의 남동생, 오빠 그리고 사촌들과 함께 골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큰아버지가 부산에 피신해 있고, 큰어머니는 친정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어머니가 해주는 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골방에서 큰어머니네 식구들과 함께 숨었습니다. 

아버지가 탈출한 그 행렬은 육십령 고개에서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행군도중 국군과 교전이 일어나자 인민군들이 이들을 전부 총살 시킨 것입니다.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 사투를 벌였고,  그리고 승리해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이제 만 91세이신 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는 또 한번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는 오랫동안 기력이 없으시더니,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고 폐렴증상이 일어나서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그리고는 몇날며칠을 산소흡기에 의지하며 사투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삶과 죽음을 가르는 두번째의 전쟁이자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6.25 전쟁당시에 죽음의 행렬에서 기지와 의지로 살아남으신 것처럼, 이 전쟁에서도 아버지가 꼭 승리하셔서 나의 등불로 더 머물러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아버지는 병이 많이 호전되어 중환자실을 떠나 일반병실로 이동하셨습니다. 아직 말씀은 못하지만 의식은 회복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볼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빨리 회복해서 함께 지내요. 된장국도 끓이고 갈치도 구워서 함께 먹어요. 제가 맛있게 요리할께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득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퇴직을 늘 기다려 왔습니다. 퇴직한 딸과 함께 지내는 것을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퇴직을 언제하노?" 하고 자주 물었고, 내가 얼마 얼마 남았다고 답하면, 아버지는  "아직 그렇게 많이 남았나?"라고 되물었습니다. "벌써?"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아직"이라는 표현으로 딸과 함께 있지 못함의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나는 퇴직을 했고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언제든 아버지와 밥상을 마주하며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여생에 아버지의 사랑하는 맏딸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정혜정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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