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의 절들

석가모니불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늘 혼란스럽고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미륵은 불교적 메시아사상을 담고 있는 부처입니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아스라한 미래에 석가모니 후임으로 사바세계의 부처가 될 미래불입니다.  

미륵이 사바세계의 부처가 되면 용화수라는 나무아래에서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교화하게 됩니다.

미륵은 아직 도솔천에서 깊은 사유에 잠겨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많아 고통이 매우 컸던 우리나라 남쪽 해안 지방에는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미륵이 반가사유의 모습에서 벌떡 일어나 지상에 왕림하기를 사람들은 염원했습니다.  

 

통영시 미륵섬은 미륵하생을 위해 만들어진 섬입니다. 섬은 미륵산을 가운데에 두고 차로 한 바퀴 일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륵산은 산을 얹어놓은 그만큼의 작은 산입니다.

산의 남쪽에 미래사가 떨어져 있고,  용화사에서 산위쪽으로 난 길은 관음사를 거쳐 도솔암으로 올라갑니다. 용화사에서 관음사까지 20분, 관음사에서 도솔암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세 절은 미륵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관음보살의 안내를 받고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을 하도록 그려져 있습니다. 미래사(彌來寺)라는 절이름은 미륵부처님이 오실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이 산의 간판입니다.

용화사는 용화수를 상징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용화사의 실질적 중심전각은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전입니다. 용화전은 미륵산의 주봉인 큰망을 뒤로 하고 북향인데, 효봉대종사 5층사리탑과 나란히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관음사의 절문에 걸린 '당래선원(當來禪院)'이라는 편액은 당래교주인 미륵불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야산 가야총림의 방장이던 효봉스님은 6.25 전쟁으로 해인사에 더이상 머물 수없게 되자, 부산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제자 구산과 함께 미륵산 도솔암으로 왔습니다.

효봉은 스님의 법호이고, 학눌(學訥)이라는 법명을 썼습니다. 학눌은 ‘지눌을 배운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효봉은 지눌의 사상을 계승했습니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정혜쌍수란 선정과 교학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지눌의 이론입니다.  

관음사에 걸린 거지전(車遲殿)이라는 특이한 전각이름도 ‘천천히 수레를 굴려라’라는 뜻이고 보면 효봉 입적 후에도 미륵산이 효봉을 대신해서 지눌의 점수(漸修)사상을 은근히 설법하고 있습니다.

  

나는 청년시절에 구산스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미래사에는 구산스님이 남긴 편액이 두 개 걸려 있는데, 설매당(雪梅堂)과 자항선원(慈航禪院)입니다.

낙관으로는 석사자(石獅子)와 타우자(打牛子)를 썼습니다. 석사자는 살을 바늘로 찔러도 바늘이 오히려 부러질 정도의 맵고 단단단 선승의 기개를 표현한 것이고, 타우자는 보조국사 지눌의 낙관인 목우자(牧牛子)를 패러디 했습니다.

효봉스님과 제자 구산스님은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정화운동은 고려시대 지눌의 정혜결사 운동에 이은 불교혁명이었습니다. 정화운동을 통해 우리나라 불교가 종파별로 새롭게 정리되고, 조계종 불교가 보조국사 지눌을 경유해서 육조혜능에 뿌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미래사에서 효봉을 만나 출가 했습니다. 시인 고은도 일초라는 법명으로 미래사에 와서 원주 소임을 보게 됩니다. 일초는 원래부터 스님 될 자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효봉스님은 갓 들어온 행자를 법정(法頂)이라 부른 것에 반해, 일초를 ‘법치(法痴)’라 불렀다고 합니다. 불교의 진리를 법(法)이라고 하는데, 법정은 법의 꼭대기라는 뜻이고, 법치는 법정의 반댓말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법치는 중노릇 못하고 곧 환속할거야.”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법정은 이름값대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큰스님으로 살다가 입적했습니다.

이현도 글

- 이 글은 창원대신문 2000년 6월5일자, 월간반야 2001년 1월호에 게재한 나의 글을 고쳐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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