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바라밀(六波羅蜜)이 가장 빠른 길

“누워서 죽거나 앉아서 죽은 이는 많으나 서서 죽은 이가 있더냐?”

“있습니다.” “그럼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죽은 이를 봤느냐?”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보여주지.” 

중국 당나라 때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제자로 유명한 등은봉(鄧隱峰)스님이 오대산 금강굴에서 입적할 때 있었던 일화이다.

그 후 제자들이 스님을 다비(茶毘)하려고 법체(法體)를 눞이려 했으나, 차돌같이 찰싹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으니 속수무책이었다. 

하는 수 없이 수소문 끝에 스님의 여동생인 비구니 스님을 겨우 찾아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비구니스님이 법구(法具) 앞에 당도하자마자 대뜸하는 말이 

“평생토록 사람들을 귀찮게 하더니 죽을 때까지 속을 썩이는구려” “이놈의 오빠야 이제 더 이상 장난치면 내가 가만두지 않으리다.” 하면서 손가락으로 툭 치니 등운봉스님의 법신(法身)이 힘없이 쓰러졌다 한다.

오늘의 이 이야기 역시 어제 설명한 방거사와 딸 영조의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으로서, 선(禪)의 경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선(禪)의 경지를 경이롭게 보게도 되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너무나 건조할 정도로 인간미가 전혀 없을뿐더러, 정(情)이나 감동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그러나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때와 장소, 그 어떤 모습과 광경에서도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더 이상의 흔들림과 걸림이 없는 편안과 평안의 극치를 보여줌이니, 이 얼마나 위대한 깨침이던가.

감정이 있다하여 유정(有情)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은 중생심인 정(情)으로 살아간다. 정이란,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감동은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의 교차점에서 눈물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다.

또 사람들은 정의로움에서 감동을 많이 느낀다. 정의(正義)는 불의(不義)를 내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면밀하게 따져보면 불의는 내 스스로가 정한다. 

다수가 보는 불의와 내가 보는 불의가 상충할 때가 많다. 어쨌든,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서 감동을 느끼는 한편, 이를 같이 하는 것을 의리(義理)라고 한다.

그러나 정의를 원하고 정의의 편에 서서 불의를 물리치는 것까지 모두다 동의하고 옳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본말(本末)과 주종(主從)이 바뀌었다는 것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의의 사도(使徒)이든 불의의 악도(惡徒)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 감정의 업(業)으로 귀결이 된다.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분별심없는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떤 인연을 만나더라도 걸림이 없게되니, 

이 같은 무분별심(無分別心)을 갖기 위해서는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없애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 진우스님 오늘의 명상 (2019.05.04.)
- (사진) 전남 구례 사성암 (202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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