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1894~1982)

1950년 일어난 6ㆍ25전쟁은 휴전 이후에도 온 국토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그 기능을 수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를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영주동 부산역전 대화재는 조금씩이나마 재건을 이루며 일상을 회복하던 부산 시민들의 희망을 삼켜버렸다.

모두가 좌절에 빠져있을 때, 미군 창고를 열어 3만 명의 이재민에게 잠을 잘 수 있는 텐트, 의류, 침구류, 식량 등 군수물자를 긴급하게 지원한 이가 있다. 

바로 유엔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복무하던 '리차드 위트컴' 이다. 위트컴 장군은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 진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위트컴 장군이 지원한 텐트에서 누군가는 삶을 이어가고 누군가는 미래를 꿈꿨다. 

정작 위트컴 장군은 부산 시민에게 베푼 선행으로 되려 고초를 겪었다. 군수물자를 함부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준법 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까지 불려갔다. 

하지만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영문*)"라는 말로 미국 의회를 설득했고, 기립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을 받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도 리차드 위트컴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찾고, 이를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전쟁의 여파와 잇따른 화재로 피폐해진 부산 시민들에게,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과 인류애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자 '선물'이었다.

리차드 위트컴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장군'으로 불렸다. 그는 부산 대청동 메리놀병원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헌금하도록 했고, 직접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시내를 활보하며 모금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주민 후생주택 건립, 보육 및 요양 시설 건립, 부산대 장전캠퍼스 50만 평 부지 마련 등 곳곳에서 그의 선행을 확인할 수 있다. 

리차드 위트컴은 유언대로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유일한 장성이기도 하며 그의 한국인 부인 한묘숙 여사의 유해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 

오는 2022년 7월12일(화)은 위트컴 장군의 사망 40주년이며 제4회 추모행사가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 (영문*) 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
- 리차드 위트컴, 6.25전쟁 폐허 속에 핀 인류애, 오상준 저, 호밀밭  (2022.05.31.)
- 교수신문, 리차드 위트컴, 최승우 (2022.07.08.)
- 네이브블로그, (주) 군월드, 사회공헌,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아시나요? 군월드 (2020.07.15.)
- 네이브블로그, 따뜻한 사람들, 생활속 이야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배려가 세상을 바꾼다. (2019.08.25.)
- 노컷뉴스, 유엔평화기념관, 제3회 리차드 위트컴 장군 기념 세미나 개최, 송호재 기자 (28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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