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김동헌 병원장 칼럼

병원.(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제공)
병원.(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제공)

필자가 부산대학교병원 교수로 재직 시 일이다. 퇴근하려고 병원을 나와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뒤돌아보며 불쑥 “대학병원의 의사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부산의 의료수준이 서울에 비해서 10년이나 뒤진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재차 물었다. 이 기사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각과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지역에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대뜸 나는 “이 택시와 운전기사님의 수준도 서울에 비해서 10년 뒤지느냐? 친절이나 서비스, 차량의 수준이 모두 서울에 비해서 10년 정도 뒤지겠지요.” 하고 되물으니, 펄쩍 뛰면서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자신도 서울에서 택시를 타봤는데 부산 차나 서울 차가 모두 비슷하고, 기사의 친절도도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항변하는 그에게 나는 “부산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말했다.

우리나라 현대 의학은 부산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145년 전인 1876년(고종 13년) 일본사람이 설립하고 고종황제가 인가를 한 관립 제생병원이 그 뿌리인 셈이다. 이로부터 9년 뒤인 1885년 서울에서도 광혜원이 설립됐고, 비로소 현대의학을 선보였다. 이 역사적 사실은 부산부립병원 편찬자료 제1권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확인된다. 그 기록에 따르면 1876년 2월 26일 조선-일본 수호조약 체결에 따라 부산항이 정식으로 개항되면서 부산엔 일본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일본사람들은 이미 서양 의술의 우수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역을 위해 조선에 나와 장기 체류하는 동안 현대 의료시설 부족에 따른 불편함을 자주 호소했다. 당시 부산의 초량에는 서양의술을 익힌 일본인 의사 다가다 이에사쿠(高田 英萊)가 와있었지만, 이에 걸맞은 의료시설이 태부족해서 제대로 진료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당시 일본의 조선수신사들과 동행했던 해군 군의관 야노 기테스(矢野 義徹)는 두 차례나 조선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부산에 병원 설치의 필요성을 일본 정부에 간곡히 청원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876년 11월 13일 고종황제의 허락을 받아 부산에 관립 제생병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이유는 ‘자국민(일본인) 보호는 물론이고 널리 의술을 조선인에게도 베풀어 조선의 개발유도를 위하여’ 라고 되어 있다. 이 사실들은 11, 12대 부산의료원 원장을 역임했던 부산대의대 유총일 교수가 부산부립병원 편찬 자료를 발췌하여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유 교수의 자료를 통해 3가지가 확인됐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서양의술을 시행한 의사는 일본인 다가다 이에사쿠(高田 英萊)이다. 두 번째는 근대 서양의 의료가 조선 침략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인 진료 의사들의 휴머니즘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야노(矢野) 군의관은 부산 개항 전후 두 번의 조선 방문을 통해서 조선인들이 처한 참담한 의료현실을 목격하고 고민에 빠졌고, 그의 깊고 높은 인간애를 편찬사료에 나타나 있었다고 기술했다. 당시 조선의 현실은 평균수명이 40세 이하이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천연두, 장질부사(장티푸스), 콜레라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요즘의 코로나감염 사태보다 훨씬 비참한 현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76년(고종 13년)에 설립된 제생병원은 이듬해 3월부터 매달 15일마다 천연두 예방접종을 무료로 시술했다. 1879년 6월 부산지역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그해 8월 제생병원은 일본 본국에 요청해 부산항을 통한 무역을 중지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제생병원은, 우리나라 종두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지석영 선생이 1879년 10월에 야노 군의관으로부터 70일간 종두법을 익혀서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제생병원의 개원식에는 조선 정부 측 관리도 참석했다. 1878년 한성순보 제33호 보고에 의하면 그때까지 일본인 2,998명, 조선인 729명을 치료했고, 1877년에 장질부사, 콜레라, 이질 등 역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나 당시 제생병원에서는 현대의술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제생병원은 1885년 명칭이 부산공립병원으로 바뀌었고, 의사 2명, 보조원 1명, 약제사 2명, 서무담당 2명, 소사 2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1914년 4월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면서 이 병원은 부산부립병원이 되었고, 1937년에 현재 부산대학교병원 자리로 이전하여 1947년 부산시립병원으로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시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가, 1956년 11월 대통령령으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

병원 부지를 부산대의대 부속병원에 양보한 부산시립병원은 1956년 충무동 1, 2가로 이전하여 진료를 하다가, 부민동과 연산동으로 전전하던 중 1985년 3월 지방공사 부산광역시 의료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2001년 12월 현재의 거제2동 신청사로 이전하여 부산광역시의료원으로 되었다.

이처럼 문헌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나라의 현대 서양의료는 서울에 비해서 9년이나 앞서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관립 제생병원에서 시작된 현대 의료의 역사가 일제의 침략과 함께 시작된 치욕적 역사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 서양의료의 효시가 부산이라는 점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의 의료인들이 의료관광을 통해 ‘K메디’의 세계화에 앞장서려는 이유가 이런 역사적인 자부심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일거다.

<온종합병원장,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김 동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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