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세스카 남편은 가난한 독립운동가 (5/6)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자란 나에게는 낯선 미국에서의 궁핍한 결혼생활이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것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남편은 언제나 그분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곧 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먹는다"는 한국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던 남편으로부터 나는 가난한 생활을 품위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 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 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 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신혼시절의 내 꿈은 하루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집을 갖는 것이었다.

지금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워싱턴에 살던 시절 남편과 함께 눈을 치우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않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집 앞의 눈을 치웠다. 

그당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은 우리집 단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남편과 같이 했던 일은 내 가슴 속에 즐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독립운동 하느라 밤낮 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 때 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기자와의 약속시간을 지키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 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 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 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 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 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 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때부터 자동차 운전만은 꼭 내가 해야되겠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남편으로부터 자동차운전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살았구나" 하고 정신이 드는 남편의 차에는 나 이외엔 누구나 타기를 꺼렸다. 그러나 내가 운전할 때는 비단결 처럼 곱게 몬다고 남편은 나를 "실키 드라이버"라고 불렀다.

운전대를 잡으면 폭풍 처럼 격렬하게 달리지만 붓글씨를 쓰거나 시를 지을 때는 남편은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했다. 

늘 젊고 건강했던 남편의 특이한 성품은 무엇에나 열중하면 그일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책을 보거나 붓글씨를 쓸때 한번 정신을 집중하면 옆에서 창문이 깨져도 몰랐다.

일평생을 온갖 풍상 다 겪으며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해온 남편이 그토록 건강했던 것은 늘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지내는 어릴 적부터의 생활습관과 편안하고 욕심없는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사진)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 33번의 박수 갈채와 기립박수를 받았다. (NewDaily 이승만, 미의회 연설 "겁쟁이 미국" 규탄 "남북통일" 주장, 이주영 건국대명예교수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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