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세스카 붓글씨에 먹을 갈다 (4/6)

신혼 초에 우리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그때 윤치영씨 내외를 방문했었는데 윤치영씨 부인이 내게 예쁜 한복을 선사해서 입어보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무척 흐뭇해 하였고 나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 내가 한복을 즐겨 입게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의 결혼식때 나에게 한복 웨딩드레스를 지어입도록 부탁한 남편의 뜻을 따라 남궁엽씨 부인과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하얀 천으로 한복을 만들다가 그만 실패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다행히도 아들 인수가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가 아름다운 한복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한국의 아름다운 신부들이 서양식 웨딩드레스보다는 한복 웨딩드레스를 입는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하고 생각해 본다.

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던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열차나 3등 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고 재치있는 여자로 생각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농담을 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한 성격에다 건강하고 패기 넘치는 59세의 신랑에 비해 34세 밖에 안된 나는 신경성 위장병에다 변비로 신혼 초에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매일 새벽 남편이 권하는 냉수를 마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보니 내 병은 완쾌되고 건강도 좋아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보던 성경을 우리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가끔 읽어주곤 한다.

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 때마다 신경을 써야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 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등 오대양과 각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 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서른 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30여년을 줄곧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신혼시절 내가 마련한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분이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남편이 가정의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엄수하게 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맨처음 내가 한국에 왔을 때도 나는 남편이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 일로 인해 남의 빈축도 샀고 남편으로부터 여러번 책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편은 늘 학생처럼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꾸준히 공부를 했다. 

나와 결혼한 후 80이 넘을때까지도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며 틈나는대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남편이 붓글씨를 연습할 때는 언제나 내가 곁에서 먹을 갈아드렸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함께 쉬지 않고 노력하며 일하는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 것 같았다.

 

- 30년 전에 작고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88세에 남긴 멋진 뒷이야기, 이애란 Facebook에서
- 다움블로그 자유게시판, 이애란 페북 글, 가마꾼 박영섭 (2022.02.18.)
- 다움블로그, 이승만 대통령 붓글씨 도의 경지, Jovful (2020.05.23.),
  대한민국 장래도 그의 붓글씨처럼 밝고 위대하리라! 정창인 박사/ 자유통일한국 대표, (기사입력 2008.04.06.)
- 위키백과, 프란체스카 도너, 대한민국의 전 영부인

저작권자 © ONNews 오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