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세스카 눈에 비친 이승만 (1/6)

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전시관과 기념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 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관리, 건강상의 비결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듯 싶은데요" 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 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 부터 55년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라 뤼씨'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각국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 등 각방으로 활약 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성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푸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프랑스어로

 

"본 아뻬띠! (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머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분은 힘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 30년 전에 작고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88세에 남긴 멋진 뒷이야기, 이애란 Facebook에서
- 다움블로그 자유게시판, 이애란 페북 글, 가마꾼 박영섭 (2022.02.18.)
- NewDaily 정치, 연제 이승만 시대(16) 프란체스카를 만나다...일본-미국 전쟁 예상 외교독립론, 이주영 건국대명예교수
  (입력 2012.06.19. 수정 2012.06.21.)
- 위키백과, 프란체스카 도너, 대한민국의 전 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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