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칼럼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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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동거인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특히 밤중 기온이 섭씨 20도 언저리에 이르면서 가을 연주는 더욱 우렁차다. 풀벌레 소리는 한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 쏟아져 내리는 매미소리 만큼이나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조화롭다. 어느 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면, 곧이어 여기저기서 우르르, 탕탕! 하고 뙤약볕을 피해서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때로는 꽹과리처럼, 징소리처럼, 북소리처럼, 바이올린 선율처럼, 피아노연주처럼 제각각 달리 들려온다. 연주자의 악기가 바뀐 건 아니다. 언제나 같은 악기로 연주하는데도 여러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한다. 그날의 악기와 곡목을 정하는 건 연주자인 풀벌레가 아닌, 오롯이 청중인 나 자신이다. 나의 마음가짐에 따라 매일매일 풀벌레의 연주가 달라진다. 기분 좋은 날엔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나를 휘감으며 꼬옥 끌어안는다. 일에 지쳐 어깨 축 늘어진 날엔 한여름 매미소리보다도 더 요란스럽게 내 귓전에서 아우성이다. 귀찮고 짜증스러워야 마땅하지만 풀벌레의 연주는 축 처진 내게 기운을 북돋운다. 터키행진곡처럼. 집 가까이 다가갈수록 풀벌레 연주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가을 기운을 듬뿍 보충한 나는 거실 소파에서 느긋하게 본격 풀벌레 연주에 오롯이 몰입한다. 풀벌레들의 가을연주회가 요즘 나의 귀갓길을 서두르게 한다.

  녹음해서 두고두고 듣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녹음을 재생한 소리는 마치 김빠진 맥주 맛에 다름 아니니까. 가을 동거인이 매일매일 나의 귀갓길을 종용한다. 아름다운 선율로 유혹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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