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의 전사

전원생활에서 당신은 어느 계절이 좋은가요? 나에게 물으면 봄과 가을과 겨울이 다 좋은데, 유독 여름만 싫다고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풀 때문입니다. 여름은 풀의 계절이고, 풀의 전성시대입니다. 

 

시골집의 마당을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이유를 알겠어요. 흙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풀이 뿌리를 내립니다. 여름은 풀과의 전쟁 시즌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풀밭의 전사가 됩니다.  

 

나도 풀밭의 전사입니다. 봄철에는 나와 풀은 화해무드입니다. 평화의 시대입니다. 풀은 나를 들판에 초대해서 냉이며 쑥, 취나물과 참나물을 바구니 채로 수북수북 채워주고, 온갖 꽃들을 피우며 수다를 떨어댑니다. 그러다가 유월이 오면 풀은 서서히 나에게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나와의 국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풀은 많이 자라있긴 하지만 아직은 손으로 쑥쑥 뽑힐 정도입니다. 칠월쯤에 전투는 전면전으로 치닫습니다. 나는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풀을 뽑습니다. 풀을 뽑고 또 뽑습니다. 풀을 뽑았다고 해서 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풀을 뽑은 자리에는 작은 풀이 또 돋아납니다. 살갗의 모공에 난 솜털처럼 풀은 어느 한 곳에도 어느 한때에도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경우 인해전술이라는 말을 쓰지만, 풀은 나에게 풀 바다 전술을 펼칩니다. 

 

드디어 팔월이 오면 뙤약볕인데다 모기들의 공격이 많아지고 풀은 거칠고 독이 올라 전투는 한층 격렬해집니다. 절정입니다. 나는 풀을 쓰러 뜨리고 또 쓰러뜨린 뒤 쓰러진 풀을 밟고 전진합니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 이때가 전원생활을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회는 칼로 물 베기입니다. 전투는 늘 승리하게 되어있고, 짜릿한 성취감은 삶의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시골의 밭 가운데에 간간이 있는 무덤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이 무덤들을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밭에서 풀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풀밭 전사의 무덤이라 상상합니다. 

 

정혜정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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