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낮. 황혼

최남선은 불교의 특성을 말하면서 "인도불교는 서 론 불교이고 중국불교는 각론 불교(종파불교)이며, 한국불교는 원효스님에 의해 서론과 각론이 종합된 통불교적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효(元曉․617~686)는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갖가지 종파 불교가 원효를 통해 하나의 진리에 귀납됐고 종합 정리되었으며 대립이 없는 차원 높은 불교의 사상체계가 세워졌습니다. 원효는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내용의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수행자의 삶과 속인의 삶마저도 하나로 회통시켰으며,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원효가 민중불교의 새벽을 열었습니다. 

 

보조(普照) 국사 지눌(1158~1210)이 살았던 때는 불교가 민중들의 삶에 깊숙이 젖어 있었습니다. 혁명가였던 지눌은 <정혜 결사문>을 지어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천명했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보조국사의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에로의 복귀 작업이었고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해 함께 수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보조에 의해 한국불교가 찬란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들어 억불정책이 시 작으면서 불교는 점점 쇠퇴해져 갔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줄행랑을 났습니다. 임금의 전갈을 받은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고 스스로도 노구를 이끌고 의승 군을 통솔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산대사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남긴 <선가귀감>은 후세인에게 말 그대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원효와 보조와 서산이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그들의 이름값을 했습니다. 원효는 새벽이란 뜻입니다. 원효 때의 불교는 새벽이었습니다. 보조는 해가 널리 비추니 한낮을 의미합니다. 보조 때 불교는 전성기를 이루는 한낮이었습니다. 해가 걸려있는 서산은 황혼을 의미합니다. 서산에 이르러 한국불교가 노을빛을 토해냈던 것입니다. 

 

근래에 들어 효봉(曉峰) 스님이 불교의 새벽을 다시 열었습니다. 효봉은 새벽 산봉우리란 의미입니다.  

 

이현도 글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2000년 2월 17일 자에 게재한 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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