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부재의 관습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김소월 시 <진달래꽃>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숨어 있습니다. 숨어있는 주어를 끄집어 내어서 시의 문장에 끼워 넣는다면 시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입니다. 주어가 없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주어를 쓰지 않는 것은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굳이 주어를 넣어서 " 나는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주어를 넣어서 "나는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영어와는 대비됩니다. 영어의 경우는 주어가 없이는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문장에서 주어를 숨기고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의 관습에서도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가 숨어 있거나 아예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체를 여간해서 잘 드러내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대체 저 전각은 누가 설계를 했고 누가 지었는가? 현판 글씨와 주련 글씨는 누가 썼으며, 벽화나 민화는 누가 그렸는가?

문화재의 많은 것들이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나서서 밝혀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춘향전이나 흥부전과 같은 많은 고전이나 동화에서도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전승되고 있는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체의 부재는 책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의 질곡에서도 그 질곡을 책임진 주체가 부재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역사적 실수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것이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주체 부재의 관습입니다. 

 

이현도 글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1999년 12월 16일 자에 게재한 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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