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견훤. 정여립

미륵이라는 말은 희망을 뜻하기도 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를 음역(音譯) 한 것입니다. 미륵은 희망의 상징어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이고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민중은 미륵을 찾았습니다.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미륵으로 비추어지기를 바랬습니다.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불에 기대어 세상을 개벽해 보고자 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미륵의 화신이라 자처했던 후백제의 임금 견훤은 재임 시에 금산사를 중창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열 명이나 두었습니다. 열 명의 아들 중 넷째인 금강을 총애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 신검이 참다못해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습니다. 견훤은 졸지에 연금되는 신세가 되었다가 겨우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왕건에게 붙어서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공헌을 한 우스운 왕이 됐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여립(1546∼1589)이 금산사를 찾았습니다.  

그는 "천하의 만물은 공공의 것이며 임금과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다"는 공화주의 사상을 가진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불려지기를 바랬습니다. 그 이유는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 [木子亡奠邑興]'는 예언설 때문입니다. 목자(木子)란 이(李)의 파자(破字)로 이 씨 왕조를 의미하고, 전읍(奠邑)은 정(鄭)의 파자로 정도령을 의미합니다. 정도령이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정여립은 승려 의연과 모의해 이 예언을 옥판에 새긴 다음 지리산 석굴 안에 감추어 두고,  전라도 진안땅의 죽도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던 대동 계원들에게 은근히 보여주며 소문이 나게 했습니다. 정도령(鄭道令)이 새 왕조를 세운다는 소문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정여립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적신(賊臣) 정여립은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해 경전(經傳)을 통달했으며, 의논이 과격하며 드높아 마치 바람처럼 말했다. 이이(李珥)가 그 재간을 기특히 여겨 불러들여 소개해 드디어 많은 벼슬에 올려 이름이 높았다. 이이가 죽은 뒤 여립은 도리어 그를 헐뜯으므로 임금은 미워했다. 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주에 돌아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향곡에서 세력을 부려 역적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했다" 

 

민인백의 <토역일기>는 “정여립이 벼슬을 버리고 금산사 아래 구릿골 제비산(帝妃山)으로 이주해 글 읽기에 힘쓰니 이름이 전라도 일대에 높이 나서 죽도 선생이라고 일컬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비산(帝妃山)은 금산사 앞에 있는 산으로 한자말을 풀어쓰면  ‘황후 산’입니다. 이 산이 황후라면 황후의 남자는 황제입니다. 정여립이 이 산의 이름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제비산을 껴안고 집을 지어 제비산의 남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비산 일대는 풍수설에서 ‘오리알터’라고 해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의 생가터가 있습니다. 생가터 앞으로 전주천이 흐르는데 북향입니다. 풍수설에는 강물이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면 역적이 날 땅이라고 합니다. 정여립이 죽자 나라에서는 역적이 날 종자를 없앨 목적으로 생가터를 못으로 팠고, 이 동네를 팠다 하여 파소라고 불렀습니다. 

 

이현도 글
- 이 글은 월간반야 2009년 3월 (제100호)에 이일광이란 필명으로 게재한 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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