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칼럼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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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님 병문안

 

   “아니, 바쁠낀데 뭐 하로 왔노. 어서 가라. 너그 아부지 제사준비도 해야 안 되나. 어서 가거라, 난 괜찮으니까!” 병상에서 누운 채로 고모는 병실로 들어서는 내게 다짜고짜 내쫓는 시늉을 했다. 과도하게 손사래까지 치면서. 몸은 많이 회복돼 보였다. 정신도 맑았다. 며칠 전 심근경색으로 응급 심장스텐트 삽입시술 끝에 극적으로 회생한 아흔 나이의 환자 같지 않아서 더욱 반가웠다.

   ‘어서 가라’는 겉말과는 달리 고모는 침대 맡의 내 손을 꽉 붙잡는다. 주름진 커다란 두 눈에서는 연방 굵은 눈물이라도 쏟아질 태세다. 얼마나 외로우실까. 추석 하루 전이라는 사실까지 꿰차고 있는 고모의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할 내가 아니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어머니의 요양병원 생활로부터 잘 학습된 덕분에 나는 눈치껏 영상통화로 사촌여동생과 형을 서둘러 병실로 불러들였다. 고령으로 귀가 먼데다, 익숙하지 않은 디지털 비대면 면회는 환자나 가족 모두 고역이다. 짧은 시간에 서로의 얘기만 잔뜩 늘어놓기 마련이다. 제3자격인 내가 적당히 끼어들어 동시통역을 해야만 비로소 대화가 이뤄진다. 역시 고모의 첫마디는 내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바쁠낀데 병원엔 오지마라, 나는 괜찮다, 너그들만 건강하모 된다. 어서 전화 끊어라!” 고모의 말을 전화 너머 사촌들에게 내가 이렇게 통역했다. “고모가 억수로 보고 싶답니다. 시간 날 때 자주 들러야겠어요!”

   입원 중인 고모의 속내를 제대로 확인한 나로서는 다른 약속을 잠시 접고 한참 병실에 머물러야 했다. 아버지의 삼남매부부 중에서 고모만 남았다. 그날 고모에게서 문득 문득 아버지, 어머니, 삼촌, 숙모, 고모부까지 회억할 수 있었다. 지금 고모는 내게 그 존재감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가난한 소작농가의 막내딸로 태어난 고모는 억척 삶을 살아내야 했다. 겨우 나이 마흔에 접어들면서부터 여기저기 잔병치레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꿋꿋하게 버텨왔다. 지금 고모는 자신의 병만큼이나 외로움과 맞서 힘겨워하고 있는 듯하다. ‘바쁠텐데 어서 가라’는 말씀으로 나를 등 떠밀다시피 하시던 고모는 막상 병실을 나서는 내 등에 대고 기어이 굵은 눈물 스민 목소리를 토해낸다. “가나…, 식구들 건강 단디 챙기거라!”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모 곁에 앉아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림자까지 뿌리쳐야 했으니까.

   그날 병문안의 아쉬움은 매일매일 반가움으로 성큼 다가오지 싶다. 고모님은 심근경색에서 회복되는 대로 우리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로 했으니까. 스무 살 대학신입생 시절로 되돌아가 다시 고모와의 동거가 설렌다. 가족과 떨어져 나와 외로워하던 어린 나를 위로해줬던 고모님의 외로움을 이젠 내가 달래드려야 할 차례다. 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한가위 보름달에 기도해야겠다. 추석 한가위 연휴가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보듬어드리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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