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칼럼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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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는 1924년 일제 때 경남 사천시 작은 산골마을 노루밭에서 태어났다. ‘고상욱씨’도 이보다 좀 늦었지만, 역시 나라의 주인은 일제였다. ‘고상욱씨’의 고향은 전남 구례군 반내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스물 즈음 일제의 강제징집으로 제주도에서 기마훈련을 받고 동남아전선에 투입되기 직전 해방을 맞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고상욱씨’도 어린 나이에 강제징집 될 찰나 ‘국민학교’ 일본인 교장의 선의로 모면했다. 해방 직후 나라를 되찾은 아버지와 ‘고상욱씨’들은 좌와 우, 둘로 쪼개져 피터지게 싸웠다. 1950년 6.25가 터졌다. 아버지는 곧장 국군 통신병으로 강원도 최전선에 투입됐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느 심산유곡의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전우들이 주검으로 스러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고상욱씨’는 강원도 전선의 아버지와 달리, 우리 동네 인근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면서 빨치산으로 맹활약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고 행복한 사회주의 나라를 꿈꾸면서.

  일제의 압제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국 한반도에서 아버지와 ‘고상욱씨’는 제각각 신념에 따라 미래와 희망을 가꾸는데 최선을 다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국민학교나 중학생을 나온 동네사람들은 매사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봤다. 아버지는 정부나 관리(당시 면서기를 그렇게 불렀다)들을 믿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시골에서 유행병처럼 번졌던 돼지사육이나 양계장, 담배농사, 고추농사 광풍에도 아버지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벼농사와 보리농사에 집중했다. 유행을 따랐던 이들은 망했고, 야반도주해버렸다. 하긴 어느 해 수확량이 많다며 사탕발림으로 꼬드기는 읍사무소 직원들의 말에 결국 넘어가 한 뼘 땅뙈기에 필리핀산 통일벼를 심었다가 형편없는 품질 탓에 아버지는 영원한 ‘반정부 야당당원’을 고집했다.(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치른 대통령선거에서도 아버지는 ‘박정희후보’를 찍지 않았다. 총선에서도 언제나 허름한 형색의 야당후보를 선택한 눈치였다. 아마도 아버지의 마지막 선거로 기억되는 총선에서도 우리동네 출신 민노당 후보를 찍었을 게다. 당시 그가 당선된 걸 보면 시골 농투성이들도 그들만이 꿈꾸는 ‘해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위장 전향하고 출소한 ‘빨치산 고상욱씨’는 귀향한 고향에서 민노당 당원으로 살았다. 제 집일보다 동네일에 더 매달렸다. 제 논에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도, 이웃에서 급히 도움을 청하면 하던 일을 내팽개친 채 냅다 달려갔다. 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지나가는 길손을 불려들여 ‘따순 밥 한 끼’ 대접하는 걸 잊지 않았다. ‘빨치산과 사회주주의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데올로기에 목매단 채 ‘배부른 부르주아 이웃’을 해코지하는 일은 없이 경우 발랐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좌우 갈등의 골보다 더 깊이 파인 미간이 좀체 펴지지 않았던 아버지와 ‘고상욱씨’. 관 속에서 비로소 고통과 번뇌의 미간을 풀고 평온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고상욱씨’는 죽어서야 해방이 된 것일까.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의 신간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는 내내 8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나는 소설 속 ‘고상욱씨’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그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내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봤다. 아버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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