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종합병원 임종수 행정원장 칼럼

블로그_따뜻한 사람들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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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머리카락

 

  샤워를 끝내고 손바닥으로 배수구 위를 훑는다. 잘 띄지 않던 머리카락들이 눈앞에 드러난다. 길이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희끗한 색깔로서 머리카락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졌다. 한때 샤워장을 함께 사용하는 큰애 것으로 우겨본 적도 있었다. 그만큼 내 모공은 건강했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들은 강했으니까. 당연히 짙은 머리숱이 영원할 거라 여겼는데…. 머리를 감을 때 내 손가락의 힘에 의해 중간이 끊어진 것들이면 차라리 좋겠다는 마음은 이런 내 바람이 비쳐진 걸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쓸어 담으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다. 모공이 세월에 떠밀려 60년 넘게 꽉 부여잡고 있던 머리카락들을 놔버린 것이라면 걱정스럽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샤워장 바닥을 훑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씁쓰레해지는 듯하다.

  아무 데서나 머리카락 좀 털지 마라, 온 거실에 당신 머리카락들이 굴러다닌다! 샤워장을 빠져나와 거실을 걸어 다니면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 때면 어김없이 아내는 지청구를 날린다. 이미 샤워장에서 울적해진 마음에다 지청구까지 더해지면서 불현듯 건조하던 씁쓰레함이 축축하고 눅진한 짜증으로 돌변한다. 짜증의 대상은 분명하지 않다. 지청구를 날린 아내 쪽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내 짜증은 가슴 한 구석에서 요란하게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채 우르릉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진다.

  가을날 길 위에 구르던 알록달록 고운 이파리 하나를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 넣던 아이는,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는 초로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단풍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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