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인상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친구들과 함께 국수집에 들렀다. 미식가들이 십리길 마다 않고 찾아올 만큼 유명한 김해 대동할매국수. ‘순삭’해 버린 국수 곱빼기 한 그릇 값이 5,500원. 곱빼기로 배가 부른 친구가 반세기전 국수 값 기억을 트림하듯 털어낸다. 그때 아마 국수 한 그릇이 20원이었지, 라면 한 그릇도 똑같이 20원이었고! 내 기억의 얼개도 얼추 친구의 그것과 어슷비슷하다. 다만 내 경험 치에서는 라면 값이 국수 값도 보다 조금 더 비쌌던 듯하다. 버짐 핀 얼굴에 땟국 졸졸 흐르던 나 같은 촌놈들이 국수그릇을 붙잡고
‘청년’ 가게 겨우 1년도 못 버티고 동네 고깃집이 문을 닫았다. 처음엔 서울 홍대 앞에서 쇠고기 차돌박이로 유명세를 떨치던 가게라며 요란을 떨었다. 소의 앞가슴의 갈비뼈 아래 부위에 붙어 있는 차돌박이는 살짝 불기운만 스쳐도 육즙 푸짐하고, 지방이 타는 향긋한 냄새가 얼마나 식욕을 자극하던가. 아들 둘을 데리고 꼭 거기 들러서 차돌박이를 먹어보려 했는데, 코로나 등으로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폐점되는 바람에 맛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 고깃집 자리엔 ‘청년’을 내건 찌개식당의 개점이 커밍순 할 예정이란다. ‘청년’이라는 식당이름
오타니와 이치로 일본인 오타니 쇼헤이 선수(미국 프로야구 LA에인절스)가 100년을 훌쩍 넘기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역사상 전인미답의 기록을 달성했다. 10승과 30홈런을 한 시즌에 동시에 이룬 메이저리그 최초선수란다. 이전까지 기록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전설 베이브 루스가 1918년에 세운 10승-10홈런이 최고였다. 지난해 1승이 모자라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뛰어넘지 못했던 오타니는 올해 들어 10승-10홈런은 물론, 10승-20홈런에 이어 10승-30홈런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투수와 타자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는 현대야
소외된 추석 추석 사흘 전 차례준비를 의논하려 고향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추석에 내려오지 마. 차례준비는 다 해놨어!” 지금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태풍 힌남노 피해상황을 묻는 등 몇 마디 더 건네고는 끊었다. 의례적인 말이거나, 현실적인 내 사정을 배려했겠거니(사실 내가 운전면허가 없어 늘 아내의 차에 동승하는 처지를 형이 감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고 받아넘기고는, 추석 하루 전 다시 귀성길 얘기를 꺼냈더니 형은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고. 형의 말은 단호했고, 내가 더 이
이른 출근, 깜빡 잊는 것들 월요일 아침, 출근채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반. 평소보다 20분 이르다. 소파에 눌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킬링타임을 해야 하나. 그냥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나설까. 후자를 따르기로 했다. 아마 출근의 무게가 다른 때보다 가벼운 느낌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2층에서 산책 나서는 노부부가 탔다.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시원한 공기가 정신을 퍼뜩 들게 했다. 아차차! 손목이 허전하다 싶었는데 시계를 깜빡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까지 올라가서 시계를 차고
금정산기슭 좌판의 감귤 이른 가을의 풍요에 허전해진 산행 나그네들이 금정산 길목에 전을 펼치고 있는 좌판을 기웃거린다. 근처 밭에서 따내온 듯 온갖 채소들이 플라스틱 바가지 넘치게 담겨 있다. 진보랏빛 가지는 차라리 윤기 자르르 흐른다. 잔털이 가시 돋힌 둣한 오이. 막 줄기를 걷어내고 파낸 고구마와 그 줄기. 오래된 줄기에서 새로 돋은 호박잎. 푸릇푸릇 배추. 푸성귀를 담은 할머니의 좌판 그릇은 이미 내 추억의 동심이 넘치고 있었다. 유년시절 하굣길 길가 밭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가 어찌나 허기를 재촉했던지. 좌우로 눈치를 살피
고모님 병문안 “아니, 바쁠낀데 뭐 하로 왔노. 어서 가라. 너그 아부지 제사준비도 해야 안 되나. 어서 가거라, 난 괜찮으니까!” 병상에서 누운 채로 고모는 병실로 들어서는 내게 다짜고짜 내쫓는 시늉을 했다. 과도하게 손사래까지 치면서. 몸은 많이 회복돼 보였다. 정신도 맑았다. 며칠 전 심근경색으로 응급 심장스텐트 삽입시술 끝에 극적으로 회생한 아흔 나이의 환자 같지 않아서 더욱 반가웠다. ‘어서 가라’는 겉말과는 달리 고모는 침대 맡의 내 손을 꽉 붙잡는다. 주름진 커다란 두 눈에서는 연방 굵은 눈물이라도 쏟아질 태세다. 얼마
20여 년 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유럽암학회 위암 분야 학술회의에서 지역에 따른 위암의 발생 빈도에 관한 보고서가 발표됐다. 당시 참석했던 필자는 동양,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위암 발생 빈도가 서양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는 내용에 주목했다. 서양에서 위암 발생 빈도가 낮은 것은, 동양에 비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감염률이 낮은 데다 소금 섭취량이 매우 적은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제시됐다.원래 위장은 높은 산도가 유지돼 균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위 내의 점막에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파트 지하주차장 태풍 힌남노가 물러간 날 아침 출근하려고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갔더니 어지럽고 복잡했다. 차들로 꽉 차 있었다. 통로까지 점령했고, 심지어 2중 주차까지 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평소엔 대로변과 곧바로 연결돼 있는 지하 2층과 지하 3층 주차장을 선호하지 않았던가. 차를 타고 밖으로 나서니 이웃 아파트단지에서도 입주민의 차들이 가로수 아래 도로변에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강한 비바람이 동반하는 태풍에 대비하려면 응당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는 게 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파트 주
태풍 힌남노는 지나가고 열흘 정도 한반도에 숱한 공포를 확대 재생산했던 태풍 힌남노가 토끼꼬리 속으로 사라졌다. 출근시간에 때맞춰 태풍이 지나갔지만, 금방 내 일터로 나가기 어려웠다. 늘 이용하는 지하철 운행이 재개되지 않아서다. 첫차부터 결행한 지하철은 오전 9시에야 운행된단다. 택시를 타려고 카카오톡이나 전화에 매달렸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들이 많아서인지 고대했던 빠른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던 터에 아내가 구세주로 나섰다. 새벽 내내 텔레비전 뉴스특보를 통해 접했던 참혹한 태풍 피해영상들이 내
너무 짧은 푸른 신호등 교통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숫자가 신호등에 나타난다. 30, 29, 28,…. 왕복 8차선이라 걸어서 건너기에 꽤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냥 터벅터벅 걷다간 이내 시간에 쫓긴다. 30에서 시작해서 30초쯤 되려니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쫓긴다. 절반쯤에서 종종걸음하기 일쑤다. 다리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고, 건강하고 멀쩡한 내가 이를진대, 어르신들로선 주어진 시간에 건너기가 숨 차 보인다. 이러다 보니 아찔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보행기를 밀거나 다리 불편한 할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사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카톡 메시지는 거두절미했다. ‘형, 무더위에 얼마나 고생 많으시냐, 가족들은 무탈하느냐’는 인사말도 ‘거두(去頭)’했고, ‘늘 건강하시라’는 말미의 당부인사도 ‘절미(截尾)’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밀었다. 수 년 간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던 아들이 포기하고 취업하려니 병원에 일자리를 알선해달라는 거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무슨 일이든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게 하겠다는 아들의 다짐까지 대신 전해왔다. 대학졸업
출근길 우산 속 몽상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면서 노란 우산을 받쳐 든다. 우산 색에 물든 주름진 60대는 노란 병아리 동심에 빠져든다. 빗소리가 가만히 두드리는 타악(打樂)이 우산 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진다. 우산을 든 걸음마다 리듬을 탄다. 밤새 연주하던 풀벌레들이 가느다란 빗줄기를 피해 우산 속으로 뛰어든다. 타악의 연주에 맞춰 풀벌레 합창소리가 우산 속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우산의 천장에 부딪힌 소리들은 서로 뒤엉켜 교향악으로 하모니를 이룬다. 끼이익! 우당탕탕! 자동차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북소리요, 심벌즈인가. 빗소리, 풀벌레
사카린의 대변신 다이어트를 하는 청년이 밥 대신에 달달한 초코바를 먹는 걸 목격했다. “아니, 그렇게 열량이 높은 걸 먹어도 되느냐?” 걱정을 담은 내 질문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카린이 들어 있어 굉장히 달콤하지만 열량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더욱 놀라서 엉겁결에 되물었다. “사카린이라고? 그건 독약이나 마찬가지인데?” 가난했던 유년, 어머니는 단맛을 내야 할 때면 으레 사카린을 찾았다. 여름철 미숫가루에 단맛을 낼 때에도, 텃밭에서 따온 토마토 위에도 사카린을 뿌렸다. 심지어 학교에서 급식으로 받아온 딱
먹음직스럽지만… 아파트 가로수 아래 보도블록이 거뭇거뭇하다. 무언가 짓이겨졌던지 얼룩져 있다. 길 위에는 여기저기 흑진주 같은 열매들이 널브러져 있다. 고개 들어 가로수를 쳐다봤다. 후박나무의 푸른 가지마다 까만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흡사 블루베리 닮아서 그런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입안은 새콤달콤해지고, 침샘이 마구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쳐 까만 열매 하나를 땄다. 입안에서 솟구치는 식욕과는 다르게 선뜻 맛보기가 꺼려진다. 엄지와 검지와 만지작거리다가 길 위에 툭 던져 그대로 발로 짓이겨 버렸다
자기최면 눈을 뜨니 새벽 4시. 어느덧 창을 넘어온 한기가 잠자리의 게으름을 재촉하지만, 머뭇거릴 새 없이 곧장 하루 일과의 숭고한(?) 의식에 돌입한다. 자기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소파에 누운 채 종아리 아래쪽을 좌우로 번갈아가면서 100회씩, 6번을 되풀이해서 두드린다. 반대쪽 발로써. 마지막 6번째는 100회 아닌, 80회씩만 종아리를 친다. 총 1,160회. 신장 기능을 좋게 한다는 얘기에 수년째 하고 있다. 그대로 누워서 윗몸일으키기를 100회. 복부 근육이 뻑적지근해진다. 발목지지 없이 해서 그런지 더 힘들다. 자리를 털
허공을 나는 마른 잎사귀 산등성이 위로 해가 쑤욱 올랐다. 밤의 어둠에 갇혀 있던 갑갑증을 한꺼번에 토해내기라도 하듯 내 눈동자 속으로 눈부시게 파고든다. 서둘러 거실 창에 블라인드를 내리다가 손을 멈췄다. 햇살에 둘러싸인 내 시선은 뜨거움을 안고 허공에 머물렀다. 마른 이파리 하나가 아파트 단지 위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뜨거운 햇살은 제 몸 속에 여름 내내 배여 있던 습기를 쏘옥 뺀 채 따가웠고, 가을이 성큼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철이 이른지라 단풍이나 낙엽은 아닐 테고, 어림으로 지난 강풍과 빗속에 부러진 가지의 마른
풀벌레소리와 매미소리 어스름 새벽, 뒤창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어둠에 싸인 숲은 조용히 계절의 교향악에 심취한다. 여명에 쫓겨 서둘러 달아나던 어둠도 커다란 나무 등 뒤에 몰래 숨어서 귀를 기울인다. 동녘 빛에 제 몸이 스르르 흔적 없이 녹아드는 줄도 모른 채. 계절은 소리다. 퇴근길 해거름이 자작할 즈음 온천천 갈맷길에는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해가 저물면 그 자리를 풀벌레들에게 내어주는 게 아쉬워서 그럴까. 서서히 식어가는 한여름 뜨거움이 못내 안타까워서 그럴까. 그도 아니면 7년의 긴 기다림 끝 짧은 세상살이에 화가
안경닦이 폴란드 인근 조지아에 여행을 다녀온 아내가 선물로 안경닦이를 사왔다. 투박한 인상의 조지아사람의 초상화가 그려진 안경닦이가 예뻤다. 차마 안경을 닦기가 미안할 만큼.안경닦이의 초상화와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끌렸다. 화가의 이름은 니코 피로스마니(Nico Pirosmanashvili).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조지아 국민화가로서 파블로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뜻밖에도 그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몹시 가난했던 그는 철도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홀로 그림공
대만백합 해거름 녘 아파트 앞마당을 걷는데 ‘의연함’이 감도는 꽃 한 송이가 눈동자 속으로 훅 들어온다. 하얀 꽃송이가 날이 갈수록 침침해지는 늙은 눈을 정화시키는 듯 밝게 해준다. 그 정체를 알고 싶었다. 요즘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용감하게 꽃을 피우는 녀석이 누군지 몹시 궁금했다.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자세히 살펴봐도 얼른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화관(花冠)을 보아하니 나팔꽃이 설핏 연상됐다. 꽃송이를 따라서 줄기를 거쳐 밑동까지 훑어보니 나팔꽃은 분명 아니었다. 온통 푸름이 독차지한 화단에 녀석만 유독 하얗게 눈부셨다.